수연이 생각했던 시간보다 많은 시간이 걸려 카스트로헤리스에 도착했다. 그녀는 어서 빨리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허기진 배보다 몸의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이곳에는 여러 개의 알베르게가 있어 어렵지 않게 숙소를 잡고, 씻지도 않고 몸을 누인다. 이대로 눈을 감고 깨어나지 않아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온몸이 침대 바닥에 가라앉았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다.
‘몸이 너무 힘드니까. 아무 생각도 안 난다. 육체의 고통이 마음의 괴로움을 이기는구나!’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맞은편 침대에 물끄러미 수연을 바라보는 초록 눈의 여인이 보였다. 낯익은 듯 보이는 50대 초반 정도의 서양인이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가?’
수연이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가 말을 걸었다.
- 잘 잤어요? 많이 피곤했나 봐요.
- 네.
수연은 미소를 띠고 대답했지만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여행 목적은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관계를 끊기 위해 온 여행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그녀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그가 떠난다고 했을 때 연인의 변심이 아닌 사람의 배신으로 느껴졌다.
‘누구라도 원하면 언제든 내 곁을 떠날 수 있어. 나에게만 집중하자.’
수행자라도 된 듯 그녀는 지금까지 만나오는 순례자들과의 대화를 피해 왔다.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초록 눈의 여인은 여전히 수연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수연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보통은 수연이 못 본 척하면 시선을 거둔 곤 하는데 그녀는 끈질기게 수연을 보고 있다. 참다못한 수연이 물었다.
-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 아니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아서요.
수연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갑자기 자신을 벌주는 이 수행을 그만두고 싶어 진다. 여인의 초록 눈이 뭐든 말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수연은 잠시 흔들린 자신을 책망하며 여인에게 말한다.
- 아니요. 없어요.
초록 눈의 여인이 웃으며 말한다.
- 배고프네요. 같이 식사해요.
오늘 수연이 먹은 거라곤 온타나스에서 먹은 핫초코와 길 중간에 먹은 초코바뿐이다. 갑자기 속이 쓰리다. 수연은 잠시 고민하다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오늘 밤 이 공간에서 함께 지내야 할 사람에게 이 정도 예의는 지켜야지.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왜 거절하는 것이 불편할까? 이런 약한 마음도 버리고 가야 해.’
두 사람은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순례자 세트 메뉴로 먹물 빠에야를 시키니 와인 1병이 따라 나왔다. 수연은 여행을 온 이후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술을 먹으면 감상에 젖어 눈물을 흘리거나 말을 하고 싶어 진다. 어쩐지 그녀는 이번 여행에서 자신을 혹독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록 눈의 여인이 와인 잔을 수연에게 들어 보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초록 눈 여인의 표정과 몸짓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수연은 자신도 저렇게 편안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며, 갑자기 시원한 맥주가 먹고 싶어 졌다. 이 여행에서 뭔가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녀는 그런 마음의 변화가 싫지 않다.
따뜻한 빠에야와 맥주를 마시며 잠시 행복하다고 느낀다.
‘흠. 그까짓 술과 음식으로도 마음이 변할 수 있는 거야?’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초록 눈의 여인은 수연이 웃는 것을 보고 말한다.
- 무슨 생각해요?
- 맛있네요. 잠시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 먹기 전에는 행복하지 않았나요?
-...
수연은 더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왜 말하면 안 되겠는가?
- 오랫동안 사귀던 연인과 헤어졌거든요.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깜짝 놀란다. 초록 눈의 여인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수연을 보고 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수연은 오히려 더 말하고 싶어 졌다.
- 그가 말했어요. 내가 더 이상 자신에게 의미가 없대요.
초록 눈의 여인은 여전히 아무 말 없도 하지 않고 수연을 본다. 수연은 이제 그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그를 용서할 수 없어요. 내가 뭘 잘못한 거죠? 관계 맺는 게 두려워졌어요. 그래서 여기로 도망 온 거예요. 이제 아무도 못 믿을 것 같아요.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해져야 하는 거죠?
초록 눈의 여인이 자세를 고쳐 앉고 수연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한다.
- 그래서 당신이 불행해진 이유를 찾았나요?
- 모르겠어요.
-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고 있군요.
- 그게 무슨 말이죠?
- 당신이 불행해진 이유는 다른 곳에 없어요. 그건 당신이 선택한 거니까요.
수연은 말문이 막혔다. 마음을 놓게 만들어 말하게 해 놓고, 이제 와 자신에게 불행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이 여인에게 수연은 분노가 느껴졌다.
수연은 날카롭게 초록 눈의 여인을 노려본다.
2) 수연과 초록 눈의 여인 2
- 이제 내 말 때문에 더 불행해졌나요?
초록 눈의 여인이 수연에게 물었다.
- 뭐라구요? 불행이 아니라 화가 나네요. 당신은 날 알지도 못하잖아요.
초록 눈의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연을 바라본다.
-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이 말하게 해 놓고, 함부로 말했잖아요. 이제 와서 입을 꾹 다물 건가요?
수연은 벌떡 일어났다. 부은 다리와 오랜만에 마신 맥주 탓에 잠시 휘청거렸지만 똑바로 서서 몸을 돌렸다. 그때 초록 눈의 여인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수연!
수연이 그녀에게 이름을 말해준 적이 있었던가? 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인을 바라본다.
-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의 진지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수연은 그 말이 진심이라고 느껴진다. 이 여인이 하는 말에는 어떤 힘이 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을 짓고도 그런 힘이 나온다는 것이 놀랍다. 수연은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지만 이 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
- 이제 말해 봐요. 무슨 근거로 내가 불행을 선택했다고 하는 거죠?
그녀가 살짝 미소 짓더니 이야기한다.
- 그를 만나기 전의 당신을 떠올려 봐요. 그가 없어서 그때도 불행했나요?
그를 만나기 전에 그가 없는 것이 왜 불행의 이유가 되겠는가? 초록 눈의 여인은 잠시 쉬었다가 수연의 대답을 듣지 않고 다시 물었다.
- 아니면 그와 만났던 모든 시간이 행복했나요?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수연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여인은 수연의 대답을 듣지 않고 말한다.
- 아니면 당신이 행복했던 모든 순간에 그가 옆에 있었나요?
수연이 대답하지 않아도 초록 눈의 여인은 답을 알고 있었다. 모든 대답이 ‘아니요’라는 걸.
- 이제 당신도 알 거예요. 그는 당신의 행복에 권한이 없어요. 당연히 당신의 불행에도 책임이 없답니다. 당신 스스로 불행하다는 느낌을 끌어당기고 있는 거예요. 그가 없는 삶은 불행할 거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 생각이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없다면, 당신은 왜 불행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 하는 거죠? 당신 스스로 행복을 선택하면 되잖아요.
수연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 당신 말이 논리적이긴 하네요.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 맞아요.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하지만 약해지죠. 자신에게 시간을 줘요. 저절로 그 감정은 약해질 거예요. 그게 당신을 돕는 길이에요.
- 알아요. 시간이 약이라는 거.
수연은 한숨을 깊게 쉬고 말한다.
- 그래도 어느 땐 괴로움이 나를 집어삼킬 거예요. 그럴 때도 그저 기다리라는 말은 너무 가혹하네요.
- 생각과 감정은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요.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당신이 괴로운 거죠. 생각과 감정은 흘러가요. 그건 내가 아니에요. 그런 감정이 왔다는 걸 알아차리고, 흘러가게 기다려주면 돼요.
- 흘려보내라구요?
- 맞아요. 감정이 올 때마다 관찰자가 되어서 흘러가는 감정을 볼 수 있다면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당신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내 행복이나 불행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 겁니다. 행복은 당신 내면의 기쁨에서 나오는 거예요. 당신 스스로 행복을 선택할 수 있어요.
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괴로움에 몰입해 있던 수연은 그녀의 말에 마음이 놓인다. 그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그녀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수연은 이 여인에 대해 궁금해진다. 자신은 그녀의 이름도 모르지 않는가?
- 당신은 철학자인가요?
초록 눈의 여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 아니요.
- 미안해요. 이름도 묻지 않았네요. 이름이 뭐예요?
- 윈디(windy)
- 날씨와 관련된 그 윈디(windy) 말인가요?
- 맞아요. 난 바람(wind)이에요.
수연은 여인을 보고 웃는다. 그녀의 기분을 환기시켜준 윈디에게 그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수연은 그동안 육체의 피로에 의지에 잠을 청했지만 오늘은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 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2) 수연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알람도 맞추지 않고 7시까지 자다니. 눈을 떴을 때 머리와 가슴을 누르고 있던 묵직한 덩어리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행복의 씨앗이 어딘가 자리 잡으려는 느낌 같기도 했다. 감사한 마음이 들어 윈디가 잠들어있던 침대를 보았다. 하지만 윈디는 이미 출발하고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음 여정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한다. 9월의 차가운 아침 공기에 코끝이 찡하고 온몸이 움츠러든다. 그림자를 벗어나자 따뜻한 햇살이 온몸을 감싼다. 오후가 되면 이 햇볕도 뜨겁게 느껴질 것이다.
윈디를 만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수연은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더 이상 그를 잊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쉼이 필요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생각나면 그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는 자’가 되어 동반되는 감정과 함께 흘러가게 두었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힘들게 얻은 마음의 평안이 아닌가?
수연은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반갑게 인사하며 그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여러 번 마주쳤으나 눈인사만 나누던 한 순례자는 수연에게 이렇게 말했다.
- 편안해 보이네요. 순례하는 이유에 대해 답을 찾았나 봐요.
수연은 찾아가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 잘됐네요. 설령 못 찾는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이 순례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도 괜찮지 않아요?
수연은 그동안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고 있었던 시간이 아까웠다. 이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처럼 힘들어서 떠나왔거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찾아왔을 텐데 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거나 그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왜 그렇게 인색했던 걸까?
그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 레온에 도착했다. 이제 수연은 수행자의 자세에서 벗어나 여행자가 되고 있었다. 산 마르셀로 광장으로 나가 가우디가 만든 ‘까사 데 보띠네스’를 보았다. 중세의 향기를 머금은 모더니즘 건물로 평가받는 건축물이다. 가우디가 만든 건축물을 직접 보게 되다니 수연은 감격스러워 만져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윈디의 말이 떠올랐다.
- 행복은 당신 내면의 기쁨에서 나오는 거예요. 당신 스스로 행복을 선택할 수 있어요.
레온 대성당
레온 대성당 앞에 서자 하얀 건물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치 형태의 정문에 수많은 조형물이 조각되어 있는 화려한 외관을 보며, 건축을 시작한 지 400년이 지난 후에야 완공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안으로 들어서자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신비한 분위기를 내며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게 한다.
- 감사합니다.
그녀는 누구에게 감사한 건지 알지 못한 채 그저 그 말을 시작으로 눈을 감고 기도했다. 눈을 떠보니 앞자리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수연은 단박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초록 눈의 그녀, 윈디(windy)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