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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산책 Oct 29. 2020

인생의 짐은 무겁다

1) 수연

산티아고 순례길 16일째, 수연은 메세타 지역을 걸을 예정이다. 고지대에 형성된 초원으로 끝없이 펼쳐진 밀밭 길이다. 중간에 마을도 앉아서 쉴 나무 그림자도 찾기 힘들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그녀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출발할 준비를 한다. 몸이 무겁다.

‘벌써 포기하려고? 그럴 순 없지.’

어슴푸레 어둠이 깔려 있지만 밤의 어둠과 다르다. 

'곧 밝아올 아침이 있다는 희망 때문인가? 내게는 어떤 희망이 남아 있지?’

잠깐 떠오른 생각을 고개를 흔들며 떨쳐낸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온 게 아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떠나 온 것이다.

‘길 위에서는 오직 걷자. 그냥 걷기만 하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한발 한발 내딛는다.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 새도 없이 다리를 혹사시키면서 수연은 그 고통을 그를 잊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한 시간, 그가 준 괴로움, 그의 존재 자체를 잊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의지일 뿐 끊임없이 그와 관련된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이제 그만 나를 놔줘.’

진흙 길 위 그녀의 발이 무겁다. 진흙이 신발에 달라붙고,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순간 길이 미끄러워 중심을 잃고 몸이 휘청거린다.

‘정신 차리자. 잘못하다간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겠어.’

그녀는 걷는 행위에 집중한다. 온 신경이 다리에 가 있고, 머릿속에 그는 사라졌다. 그것이 그녀가 여기에 온 이유이다.     


얼마나 신경을 쓰며 걸었는지 그녀는 진흙 길 끝인 온타나스에 도착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심지어 진흙 길이 끝나버렸을 때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한다.

‘몸에 집중하니 생각이 잠잠해지네. 오랜만에 휴식이었어.’

휴식이라는 말과는 달리 그녀의 다리는 부어 있고, 발은 여기저기 물집 투성이었다.

‘신발을 한국에서 익숙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익숙함’이라는 단어가 그녀를 아프게 한다. 그것은 그와 함께 한 8년이라는 시간을 의미했다. 갑자기 머릿속 휴식이 사라지면서 그녀는 자신의 몸에도 휴식이 필요함을 느낀다.


가까운 바에 들어가 핫초코를 시킨다. 따뜻한 음료를 손으로 감싸고 온기를 느낀다.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몸이 펴지는 것 같다. 다리는 아직 불편하지만 마음이 더 불편한 그녀는 짧은 휴식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늘은 카스트로헤리스까지 가야 한다. 왼쪽은 낭떠러지, 오른쪽은 나무가 있는 광활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제껏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가? 대자연의 품속에 있는 것이 감동적일 법도 하건만 그녀의 마음은 황량하기만 하다.

‘그와 함께 왔다면 어땠을까?’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고개를 젓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여기에 올 일도 없었겠지.’

그녀의 마음 어디까지 그가 들어차 있는 것일까? 차라리 그가 모질게 굴고 헤어졌다면 그에 대한 분노에 마음을 집중하며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텐데. 그는 그저 더 이상 그녀와 함께 하는 의미를 모르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도 그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와 지내온 대로 앞으로도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익숙함과 편안함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이상 그녀가 자신에게 의미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몸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낀다. 그렇게 느낀다한들 쉴 곳은 없다. 앞으로 1시간가량 더 걸어야 마을에 도착한다. 이제부터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도 사라졌다. 몸의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머릿속 공백 상태. 그녀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2) 서진

‘친구의 말만 듣고 무작정 오는 게 아니었어.’

힘들어하는 그에게 친구가 추천한 이 여행은 도무지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진도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인생도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여보, 우리 그만하자.”

그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껏 아내도 본인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한 번도 아내는 불만을 얘기한 적이 없었다. 서진의 노력으로 좋은 집과 경제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아내는 집을 꾸미고, 아이를 돌보며 잘 지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가 언제 그녀가 잘 지내고 있는지 관심이나 가졌던가.’

그는 그가 우선이었고, 중심에는 일이 있었다. 아내와 뜨거운 연애를 해본 적은 없었지만 관계가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것 같았다.     


그에게 관계란 이익이 되어야 성립되는 것이었고, 가족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서로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여 아내를 선택했고, 그녀는 곧잘 그의 기대에 맞추어 그 역할을 해왔다. 그가 하는 일에 비하면 아내가 하는 집안일은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규모가 있는 외국계 무역회사에 다니는 그는 몇 건의 큰 계약을 성사시키고 초고속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한 번도 그를 자랑스럽게 여긴 적이 없었다. 부부동반 모임에서 남들이 남편 자랑을 할 때조차 아내는 그에 대해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서운한 맘이 들기도 했지만 아내의 성격이려니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껏 무슨 생각을 하며 나와 살아온 걸까?’


서진은 아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선을 봤고,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대학을 나온 여자. 대화는 잘 통했던가? 아내는 연애할 때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들은 6개월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 후 아이와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아내와 대화한 기억이 없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았고, 그도 묻지 않았다. 그래도 불편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도 자신의 기분을 시시콜콜 아내에게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그녀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을까? 아이 말고는 공유하는 것이 없는 가족이라니. 이제 와서야 서진은 아내와 자신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걸까?

‘오직 나만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고?’

서진은 혼란스러웠다. 돈과 성공이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포장해왔으나 이제 그 포장이 벗겨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 커버 이미지 출처: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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