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깊었던 열매와의 하루

너를 처음 만난 날, 너를 보내야만 했던 날

by 연상은

2023년 10월 20일.

참 날짜마저 예쁘다 싶었다. 많은 날들 중에 이 날을 골랐다. 기억하기도 쉽고 숫자가 안정돼 보이기도 해서.

열매는 나와 같은 천칭자리다. 천칭자리의 시작 즈음에 내가, 끝 즈음에 열매가 있다. 이것마저 운명이라며 출산 날만을 기다려왔다.

수술 전 날, 엄마, 남편과 같이 소고기로 든든하게 몸보신을 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입원하는데 짐이 왜 이렇게 많은지 여행 가는 것 같다며 차에서 설레하던 우리 모습이 참 좋았다. 처음에는 1인실이 없다고 했는데 운이 좋게 입원 직전에 1인실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도 열매 덕분이라며 웃었다. 둘이 보내는 밤은 이 생에 마지막이라고 못다 한 이야기들도 하고 영화도 보며 편하게 잠들었다.


드디어 열매가 태어나는 날이다. 이런 날이 내 인생에도 오는구나. 내가 고생했던 게 다 이 날을 위해서구나.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선생님, 딸 맞아요?” 했더니

“딸이라고 했잖아요. 당연히 딸이죠~.”하신다. 그러면서 “왜요?” 물으셔서

“딸 아니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저 정말 딸 낳고 싶었거든요.”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앞에 간호사가 “아들만 셋인 저는 어떡하라고요~.”하신다. 그렇게 하하 호호 웃으며 수술이 끝났다.

길고 긴 시간 마음이 힘들었는데 드디어 내 과업을 끝냈구나… 임신과 출산은 이제 끝이라고 마음먹으며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실이다. 3.2kg로 아기가 잘 태어났고 신생아실로 잘 갔다는 남편의 말에 안도한다. 아니 사실 그때는 태어나면 끝인 줄 알아서 신생아실이 있고 니큐가 있고 이런 시스템도 잘 몰랐다. 애기 영상과 사진을 보여주며 상기되어 있는 남편을 보니 나도 벅차올랐다. 열매는 뽀얗고 너무 예뻤다. 쌍꺼풀도 보이고 코도 오뚝했다. 신생아인데 이렇게 예쁠 수가 있냐며 벌써부터 팔불출 엄마가 됐다. 열매는 남편을 많이 닮은 듯했다. 누구를 닮으면 어때 이렇게 예쁜데. 이 감정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나의 자식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입체적인 감정이다.


출산 당일, 난 움직일 수 없었고 남편은 저녁 7시에 면회를 갈 수 있었다. 남편은 열매가 태어난 오전부터 저녁에는 열매를 보러 갈 수 있다며 들뜬 목소리로 면회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한 시간을 꼬박 채워 아기를 만나고 왔다. 사진도 영상도 아주 많이 찍어왔다. 영상 속 남편의 목소리가 설렘이 가득 담겨있어서 지금도 소리를 켜고 듣기가 힘들다. 열매를 기억할 수 있는 사진을 많이 남겨줘서 남편에게 참 고맙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평화로웠던 병실에 평화를 깨는 전화벨이 울린다. 아기가 신생아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남편이 의사를 만나러 갔는데 난 고개도 들지 못하는 상태여서 초조하게 남편만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손이 차가워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간다. 별일 아니겠지. 기다리며 니큐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아기들이 니큐에 들어가더라. 대부분 회복해서 잘 나오니 걱정하지 말라는 글이 많았다. 처음엔 기흉이라고 했다. 만삭아고 체중도 좋은 상태니 금방 회복할 거라고. 만삭아들은 다 잘 버티고 퇴원한다고 그랬다. 걱정은 됐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겠나 싶어 잠을 청했다. 잠은 오지 않았고 기나긴 밤을 “별일 없겠지?”, “별일 없을 거야.”라는 말만 주고받으며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아침 면회 시간. 어떤 힘인지 모르겠는데 수술 다음 날에도 똑바로 일어서고 걸을 수 있었다. 아기를 꼭 보러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면회를 갔는데 아기가 처치 중이라 지금은 면회가 안된다고 한다.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병실에 올라가니 주치의가 전화를 주셨다. 상담을 해야 한다고. 아기가 새벽에 산소포화도가 너무 떨어졌다고 했다. 주말이 고비라고… 혹여나 응급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거라고. 그렇게 전달받았다.


아.. 그리고 사실 그 뒤로는 기억이 흐릿하다. 내가 겪은 일이 맞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열매라는 이름은 입에서 익숙하게 튀어나오는데, 내가 출산을 하고 그 아기를 하늘나라에 보내줬다는 걸 아직 믿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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