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5단계
실직 5개월 차다. 결혼과 역병이 맞물리면서 신기하게 일이 사라졌다. 결혼 때문이라 하기엔 진행자가 바뀐 것도 아니고 프로그램들이 싹 없어졌다. 스포츠가 코로나 직격탄을 맞으면서 그렇게 된 것인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어디선가 슬픔의 5단계를 본 적이 있는데 내 얘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딱 맞았다.
‘부정 - 분노- 타협 - 우울 - 수용'
아닐 거야.. 이럴 리가 없어라고 생각하다가 아니 어떻게 다 없어질 수가 있냐고!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예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위로하려 애써보다가 금세 우울해지기도 했다. 지금은 '수용'단계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나뿐만 아니라 다 어려운 시기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현실을 수용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여태까지는 다른 누군가가 일을 찾아주고 제안해주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닌 것 같다. 원래 했던 일과는 별개로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 지 꽤 지났다.
그런데 난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은 아니라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항간에서는 유튜브를 하라고 인플루언서로 뭘 팔아보라고 했다. 물론 요즘 뜨고 있는 활동이고 빨리 성장할 수도 있을 것 같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런데 이왕 새로운 것에 도전할 거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바쁜 일상에 잠시 잊고 있던 내 취미가 생각났다. 글을 읽고 끄적거리기. 일이 너무 바쁠 때는 힐링 차원에서, 한가할 때는 시간을 보내는 요량으로 한 일들이었다. 읽는 건 습관이 되었는데 쓰는 건 아무래도 오랜만이라 아직 낯설긴 하다. 그래도 차츰차츰 나아지겠지 하고 계속해서 써보는 것이다.
이 역병이 아니었으면 나는 뙤약볕 밑에서 어딘가를 돌아다니며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나의 행복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만약 그랬으면, 나는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하루에 만족하며 살았을 테니까.
실패와 상실은 이상하게도 다른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길을 내가 잘 선택하고 걷기만 하면, 오직 하나였던 길이 여러 갈래가 되어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한다. 참 역설적이다. 역설적이어서 좌절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