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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상은 Apr 07. 2021

생방송 중엔 별 일이 다 일어나

식은땀 나던 순간들


 생방송으로 방송을 시작해서인지, 녹화방송보다는 생방송 스케줄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이제는 빨리 끝나는 생방송이 더 편하기도 한데 생각해보면 진땀 나는 순간들도 참 많았다. 인터뷰에 관한 일들을 떠올려볼까.


 

 아나운서들은 경기가 끝나기 직전, 제작진들과 상의해 그 경기의 수훈 선수를 선정하고 인터뷰 질문을 짠다. 물론 야구 경기는 아웃카운트 하나에도 바뀌는 순간들이 허다해 인터뷰 대상이 바뀌는 건 일쑤였다. 아웃카운트가 두세 개쯤 남았을 때 질문을 연습하며 그라운드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와중에도 경기가 뒤집히진 않나 중계를 잘 들으며 가야 하는데 몇몇 구장은 그라운드로 나가는 길에는 중계가 수신이 안 되는 구간이 있다.


 원정팀의 모 선수가 수훈선수로 선정이 되어 질문을 열심히 만들어서 그라운드로 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긴 복도를 지나야 그라운드에 도착하는 구장이었는데 왠지 그날따라 중계가 안 들리는 게 불안했는데 경기가 비등비등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마..’하는 기분으로 딱 그라운드 입구에 도착했는데 홈팀 선수들이 뛰어다니며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소위 말하는 끝내기를 친 것이다. (끝내기란, 홈팀이 승부를 뒤집어 경기를 끝내는 일을 뜻합니다.) 열심히 준비한 원 질문지는 필요 없어지고 중요한 건 누가 쳤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끝내기 인터뷰가 더 쉽고 재밌는데 그때는 병아리 시절이라 당황스럽기만 했었다. 누구와 인터뷰하는지도 모르고 인터뷰 수첩도 없이 카메라 앞에 섰다. 먼저 내려와 있던 피디에게 달려가 “누가 쳤어요?”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피디 선배가 누구라고 말해줬고 침착하라며 그 선수의 오늘 활약을 속사포로 말해주었다. 어쨌든 진땀을 흘리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심장이 밖으로 나올 것 같긴 했지만 대본 없이 인터뷰를 해냈다는 게 나름 뿌듯했다.

 그리고 습관이 생겼다. 적어도 한 경기에 20명 이상이 나오는 야구는 선수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기억할 수 없어 기록지라는 걸 쓴다. 선수의 세부적인 기록들을 다 적어놓는 건데 이럴 때 기록지가 너무나 필요하다. 끝내기 말고도 그 날의 상황들도 물어봐야 했기에. 그래서 아무리 역전의 가능성이 없는 경기라 하더라도 꼭 수첩과 기록지를 같이 들고 내려간다. 그리고 안 들리는 구간은 최대한 달린다.


 또 한 번은 경기가 역전될 수 없는 안정적인(?) 상황이었다. 일찍부터 승패가 갈린 터라 여유롭게 인터뷰를 준비하고 슬슬 내려갔다. 내려가서 선수를 기다리는데 다급한 피디의 한 마디. “지금 그 선수가 병원에 가야 해서 인터뷰 못한대. 다른 선수 인터뷰하자.”

‘네...? 이렇게 갑자기요....?’

누가 올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신인 투수 한 명이 싱글 웃으며 왔다.

“갑자기 바뀌어서 제가 지금 아무런 준비를 못했어요. 이해 부탁드리고 인터뷰 잘 부탁드립니다!!”

했더니 그 선수가

“네~ 편안히 하세요~.” 하는 게 아닌가?

그 스무 살 선수가 생방송 앞에서 너무나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을 잘해주어서 나도 다시 기억 회로를 가동해 질문을 짜내는 데 성공했다. 인터뷰를 잘 마치고 “정말 고마워요ㅠㅠ.”하니 “아니에요. 저도 좋은 추억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저 대범함이 있어서 야구를 잘하는 걸까? 그래서 저 상황에서 떨지 않고 씩씩하게 자기 공을 던질 수 있는 건가.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구나.


 생방송에서는 무슨 이유에선가 별 것도 아닌 것이 참 웃기다. 그리고 웃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들어서 더 웃기다. 선수의 대답이 생각지도 않게 너무 웃겨서 꺽꺽대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팬들은 그걸 좋아해 주시고 그 팀의 경기만 가면 그 선수와 나와의 인터뷰를 기다려주신다. 내 기억으로 그 선수와 인터뷰를 네 번 정도 했는데 무사히 넘어간 건 단 한 번뿐이었다. 안 웃으려고 수첩과 마이크를 아주 꽉 쥐고 있는 사진이 찍혀 놀림도 받았었다. 왠지 그 선수만 만나면 뒤에 있던 광고판이 넘어지기도 하고 카메라 앞을 가리면서 다른 선수가 지나가기도 하고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제2 홈구장이 있는 구단들도 있는데 그 구장들은 대개 작아서 따뜻하고 정겨운 느낌이다. 유난히도 작은 구장으로 중계를 하러 가게 됐는데 중계석도 관중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보통 다른 구장은 중계석이 동 떨어져 있어 일반 관중들이 지나다니기 불가능한데 이 곳은 관중들이 지나가면서도 볼 수 있는 그런 구조였다. 캐스터가 중계를 하고 나는 기록지를 열심히 쓰고 있는데 진짜 중요한 순간에 관중이 지나가면서 경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비켜달라고 손짓을 열심히 했는데 그분은 우리가 인사를 하는 줄 알고 그 앞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주셨다. ㅎㅎㅎ 너무나 좋아하셔서 뭐라 하지도 못하고 같이 웃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생방송을 하며 가슴이 남아나질 않았다. 매일 초조했고 심장은 터질 듯 뛰던 날들이었다. 지금은 그 설렘에 익숙해져서 생방이어도 이 정도로 떨리진 않지만 가끔 그때의 그 떨림이 그립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겠다는 점에서 우리네 인생과 비슷하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가 된다. 나중에 추억해보면 또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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