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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움 Dec 28. 2023

너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

엄마가 엄마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

전라남도의 한 마을에서 태어난 엄마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소설이나 다른 사람들의 회고가 담긴 글을 읽다 보면 엄마와 유사한 나이대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돈을 벌어 가족 뒷바라지를 했던 것과 달리 엄마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양장점에서 옷을 주문해 입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할 때는 트럭에 현금을 담아서 올 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시간은 계속되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돈을 버는 만큼 좋지 못한 곳에 쓰셨고 나중에는 버는 것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하나뿐인 큰 아들이 치고 다니는 사고를 막느라 많았던 재산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결국 온 가족이 서울로 돈을 벌러 오게 되었고 아주 작은 집에서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자주 아팠던 엄마는 외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엄마와 외할머니가 알려주지 않아도 명절 때 종종 서러움을 표현하는 이모들의 푸념을 들어보면 차별이 존재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픈 자식에게 마음이 가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 테니. 육 남매(아들 밑으로 딸 5명) 큰 딸로 태어나 할아버지의 이쁨을 받아 여동생에 비해 곱게 자랐던 엄마도 성인이 되고 난 뒤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약했던 엄마는 1년이 안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엄마가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뜻을 표현할 때도 미용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고집부릴 때도 외할머니는 딸의 건강을 염려해 반대를 했다고 한다. 그때 반대를 무릅쓰고 기술을 배웠어야 한다며 푸념하듯 말씀하시는 것을 두어 번 들었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내가 하고 싶다는 것은 두 말하지 않고 지원해 주셨다.


중3학년때 친한 친구의 꿈이 영화배우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처럼 친구의 꿈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열정이 나에게 전염된 듯 무작정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유는 '미술관 옆 동물원'과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핑계를 대었지만 친구 따라 되지도 못할 영화배우를 잠깐 꿈꿨다. 그 꿈은 고등학교 진학하며 연극부에 가입하게 만들었고 무대 맛을 경험해 본 나는 결국 연극영화과에 지원하게 되었다.


연극영화과 대입 준비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엄마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지원해 주셨다. 연기는 수능 끝나고 단기간에 준비할 수 있었지만 특기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의 연영과 입시생들은 무용, 노래, 악기 등으로 특기를 준비했는데 그나마 내가 도전할 수 있는 것은 무용이었다. 아무리 짧게 준비한다 해도 반년 이상은 투자해야 했으며 안무까지 배우기 위해서는 따로 안무비를 지불해야 했다. 당시 우리 집 사정을 생각했다면 진로 선택을 포기했어야 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엄마에게 말씀드렸다. 무용을 배워야 한다고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하니 엄마는 두말도 하지 않고 허락해 주셨다. 대학 졸업 후 회사에 다닐 때도,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난 뒤에도 배우고 싶은 일이 있어 고민 중이라고 말하면 엄마는 무엇이든 하라고 응원해 주셨다. 아마도 엄마는 나를 통해 젊은 시절의 엄마가 하지 못했던 도전을 대신할 수 있도록 지원했을 것이다. 본인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그런 엄마의 헌신 덕분에 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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