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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움 Jan 17. 2024

나는 할머니가 밉다.

아빠는 여전히 외롭고 서럽다.

  어릴 적에 기억나는 아빠의 모습은 크게 2가지로 떠오른다. 흰 런닝 셔츠를 입고 잠들어 있는 모습과 술 취해서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딸들을 찾는 모습. 확실한 것은 술을 마시고 난 뒤의 아빠는 평소의 아빠와 다른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명절에 큰 아버지 집에서 모두 모이면 술을 더 마시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행동하셨다.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살아온 아빠는 장남인 큰 형과 늘 비교되었다고 한다. 3살 위인 큰 아버지는 미남형 외모에 키도 크고 공부도 잘했다고 한다.(요즘 말로 표현하면 육각형인 사람?) 당시 부산에서 가장 공부 잘한다는 애들만 가는 학교 코스를 거쳐 번듯한 직장까지 모두의 부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할머니에게 얼마나 자랑스런 아들이겠는가.


그에 반해 아빠는 할아버지를 빼다 박은 외모에 형제 중 머리는 가장 좋지만 성실함은 그만큼 따르지 못했던 것 같다. (종종 고등학교 때 했던 일을 들어보면 유추할 수 있다.) 다행히 주산 실력이 월등해 상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중견 기업에 입사해 자기 몫을 하는 어른이 되었다.


남들이 들을 때는 아빠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데 할머니는 늘 아빠를 못마땅해하셨다. 명절 때 술에 취한 아빠를 보면서 걱정하기보다는 질책하거나 비난 조의 말씀을 하셨다. 부산 사투리로 빠르게 쏟아내는 말들이 온전하게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엄마에게 들었던 이유로는 아빠가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술을 많이 좋아하셨다. 명절 때마다 찾아가보면 항상 반주를 챙겨드셨고 그 양은 많이 줄여서 하루에 소주 1병이였다. 그 시대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집안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자식에게는 엄하고 부인을 힘들게 했던 할아버지에게 쌓인 할머니의 미움과 원망은 컸다. 그리고 그 감정의 화살은 외모적으로나 성향적으로나 가장 유사한 아빠에게 향했다. 형과 동생들처럼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빠는 할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신 적이 한 번 있었는데 할머니의 방문은 엄마를 극도로 긴장하게 만들었다. 평소 불면증이 심한 편인데 시어머님이 오신다 하니 집안일의 강도는 배로 높아졌을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시어미니의 표본이다.) 점심을 챙겨드리고 잠시 짬이 난 엄마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모습을 본 할머니는 크게 화를 내셨다. 왜 화를 내셨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씀하시기로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우습게 생각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 말을 들은 아빠는 엄마에게 불같이 화를 냈고 서럽고 억울한 엄마는 결국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울음을 터트리셨다. 아빠는 거칠게 화장실 문을 발로 차며 엄마에게 사과하라며 소리쳤고 그 강도가 강해지면서 결국 화장실 문도 부서지고 아빠 발도 상처 입었다. 할머니는 그 길로 짐을 싸 나가셨고 그 뒤를 나와 아빠가 쫓아 나갔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할머니가 한없이 밉다. 그리고 아빠도. 아빠는 그때 엄마가 할머니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모르면서 할머니의 말만 듣고 엄마를 못된 며느리처럼 몰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화를 낼만한 일도 아닌데 과하게 화를 내며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아빠는 할머니 앞에서 대우받는 가장의 모습과 잘 사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으니 더 화를 내신 듯 하다.


엄마라는 존재는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첫 번째 사람이다. 하지만 아빠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받지 못한 감정을 가족에게 갈구했다. 특히 할머니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본 모습보다 더 크고 나은 모습으로 보이려고 말과 행동에 과장이 더해졌다. 명절 때 삼촌들 앞에서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웃고 떠들며 대화를 주도했다. 그러다 술이 들어가고 함께 잔을 부딪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빠의 억울하고 속상했던 마음은 술주정으로 흘러나왔다. 장남에게만 애정을 쏟았던 엄마에게 받은 차별은 지울 수 없는 아빠의 상처였다. 무장해제된 서러움은 함께 자리한 형제들을 질리게 만들었고 마지못해 들어주던 숙모들도 현상이 매년 반복되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자리를 피했다.


아빠는 여전히 외롭고 억울함이 가득한 사람이다. 어릴 때 엄마에게 받지 못한 애정은 아빠의 삶 전반을 흔들었다. 70대가 된 어른은 여전히 사랑과 인정이 필요한 아이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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