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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다슬 Oct 21. 2020

고2병을 함께한 MBTI, 그리고 수능시험

나는 씩씩한 크론병 환자입니다.<2>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야간율학습'이 아닌 독서실에서 자발적인 방과후 학습이 시작됐다.


아쉽게도 여학생과의 몽글몽글한 연애 이런 건 전혀 없었다. 다만 난 정말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시기, 삼국지(이문열 평역)를 5번은 읽은 것 같다. 책 읽다 지루하면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음악을 들었다. 특히 가수의 라이브 영상을 올려주는 온라인 사이트에 푹 빠져있었는데, 브라이언 맥나이트, 스티비 원더, 보이즈 투맨 등 흑인 가수의 음악과 우리나라의 브라운아이드소울 등을 좋아했다. 아주 가끔은 독서실 자리에서 불을 끄고 혼자 명상도 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하며, 우울한 감정을 즐기는 태도보단 앞서 말한 ‘누군가의 운명이라면 그 사람은 내가 맞겠다’는 생각으로 크론병을 잘 다스려 보리라 다짐했다.

2020년 코로나, 트로트 외 2030 사이에서 또 한 가지 유행한 게 있다면 MBTI였다. 난 사실 MBTI를 사실 10년전 이 시기 많이 했었다. 혼자만의 시간에서 (사춘기 아이들이 그러하듯) 자신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커졌고 성격 유형 검사를 실시했다. 당시에도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하면 얼마든지 무료로 검사할 수 있었다.


매번 결과가 다르게 나왔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위해 나의 일부 모습을 내 성격인 것 마냥 부풀려서 내 성격과 다른 선택지를 고른 것도 같다. 당시 난 MBTI 결과가 나의 앞으로의 인생을 대변해 줄 것 같았고, 조금 더 멋있을 거로 보이는 항목을 선택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 멋있어 보이는 성격이 매번 달랐다는 것이다. 어쩔 때는 잔다르크형이, 어쩔 때는 사업가형이, 어쩔 때는 성인군자형이 멋있어 보였다. 그에 따라 내 결과도 맞춰졌다.

하루에도 3~4번 검사를 하고, 다른 결과의 해석지를 보며 나의 성격을 어디에 맞춰야 할까를 고민했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성격검사를 진행한 것은 아니었고, 매번 진심이었다. 진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성격검사 진행방식이 내가 가진 성격의 모든 면을 펼쳐 놓고 그 와중에 갖고 싶은 결과에 맞을 것 같은 성격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었다. 만약에 내가 가진 성격들 중 원하는 결과와 맞는 면이 없다면, 난 아주 어린 시절부터의 경험을 들추어봤고 간신히 원하는 조각을 찾고 성격검사 선택지를 입력했다. 좋은 성격을 갖고자 하는 이런 과정은 매우 소모적이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가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사람은 한 가지면으로만 평가할 수 없고, 어떤 시기를 겪느냐에 따라 성향은 바뀌지 않을지라도, 성격은 바뀔 수 있겠구나라는 것이다. 사업가형의 성격과 잔다르크형의 결과 모두 나의 일부라고 결론 내렸다. 2020년이 된 지금 MBTI 풍이 불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내 결과를 물을 때 난 최근에 한 결괏값을 이야기해주고 의미를 크게 두지 않았다. MBTI 결과를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를 분석할 때, 세상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면을 볼 수 있을 텐데 외부의 기준으로 자아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누구나 차분할 때도, 흥분할 때도 있고 논리가 앞설 때도 있지만 감정이 앞설 때도 있다. 상황과 여건 등에 따라 사람은 수만 가지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난 나의 성격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성격이라고 스스로 정의했다.

독서실에서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공부하는 척을 하다 보니 나의 고등학교 2학년은 금방 지나갔다. ‘대한민국 고3’이라는 타이틀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혼자만의 시간을 핑계로 자유를 찾기엔 너무 큰 벽이었다.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자 마음먹고 수학, 영어학원도 다니고, 자율학습도 열심히 참여했다. 난 중학교 시절 전교 3등까지 해본 공부 좀 하던 놈이었다. 병원을 다니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와중에도 공부를 완전히 놓아본 적은 없었다. 또 막무가내 긍정이 발동해서 열심히 하면 인 서울 상위권 대학은 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주변 공부 잘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동기부여도 스스로 하고 건강과 학습의 밸런스를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수능 전날이 되었다.


막상 전날이 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떨렸다. 어머니께 같이 잘 수 있냐고 여쭤봤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는 내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중 하나는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알기론 5남매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릴 적 자신을 예뻐해 주는 오빠 하나가 더 있었다고 했다. 위생이나 질병 관련 지식이 부족했던 70년대 충북 음성에서, 오빠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숨을 거뒀고 그 후 오빠의 존재는 쉬쉬 되었다 하셨다. 처음 들어보는 어머니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긴장이 풀렸고 이내 잠들었다.

수능 시험을 보고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 차로 갔다. 결과가 어떨 거 같냐고 물어보고 싶은 표정이시지만 꾹 참는 부모님이 귀엽기도 했다. 나는 부모님께 역대로 가장 잘 본 셤인 거 같다고 당당히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그제야 긴장이 풀리셨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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