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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다슬 Oct 21. 2020

해피엔딩은 없습니다만

나는 씩씩한 크론병 환자입니다.<3>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수능시험 중에 엄청나게 긴장 하 있었고, 근거없는 자신감과 긍정으로 그저 잘 본 걸로 스스로 최면을 걸었던 것이었다.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결과가 나왔다. 인생 처음으로 나의 근거 없는 긍정과 자신감들에 회의감이 들었다. 다행히 수능 후 등교한 교실 안에는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많았다. 재수학원이나 기숙학원을 알아본다는 등 벌써 공부 계획을 세우는 친구도 있는가 하면, 등교 자체를 안 한 친구들도 있었다.

몸과 정신에서 느낀 인생 최초의 좌절이었다. 다들 각자의 좌절을 경험했지만, 내 좌절은 조금 다른 좌절이었다. 크론병에 걸렸을 때도 나는 정말 크론병을 이길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도 의학계에 보고될 정도로 매우 우수한 관리 사례에 들어갔다. 인생의 큰 장애물을 가뿐히 넘었다 생각했고 수능이란 시험에도 자신한 긍정은 확신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실력 없는 자존심이 가장 비참하다는 것을. 원하는 실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음에도 난 정말로 시험을 잘 볼 수 있을 거란 자기 최면에 빠져있었고, 극도의 긴장 상태는 나의 집중력을 더욱 마비시켰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라 생각한 시절, 큰 좌절을 맛본 난 비슷한 좌절을 겪은 친구의 소개로 편입이란 제도를 알았다. 대학을 다니면서 다른 대학을 중도에 입학할 수 있는 제도로, 현재 대학을 보험처럼 안정적인 방파제로 삼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당시 재수학원이나 기숙학원의 비용이 부담이던 나에게 편입 학원비는 비교적 저렴한 수준이어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입학 전부터 편입하기로 결정한 후, 내 점수에 걸맞은 대학을 우선 진학했다.

당시 내가 진학한 학교는 야간대학과 주간대학이 공존한 학교로 난 주간대학으로 입학했다. 그리곤 이내 실망했다. 입학 전부터 타대학 편입학을 결심한 나였지만, 주간학생과 야간학생이 함께 듣는 일부 전공수업에서 야간학생들의 태도가 가관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어느 날, 난 우연히 교실 한가운데 앉아있었다. 앞에 나이 들어 보이는 교수님은 강의를 하고 있었다. 주간 학생 야간 학생 반반이었던 당시 수업에서 교재를 펼친 학생은 극히 일부였다. 앞 교수님이 강의를 하든 말든 화장을 고치는 여학생, 사수생 형을 중심으로 전날 술 마신 무용담을 펼치는 신입생들, 대놓고 잠을 청하는 학생 등 학교인가 싶었다. 그날 반드시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리라 마음먹었다.


편입에 관심 있던 내게 어머니는 친척형 중 한 명이 편입해서 목표한 대학을 다니고 있다 전해줬다. 그 형은 학창 시절 소위 ‘노는 애’였다. 패싸움 등도 자주 해서 집안의 걱정거리라 들었다. 그런 형이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에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고 약 3년간 홀로 고시원에서 공부하여 편입에 성공했다. 워낙 기초가 없는 형이었기에 수험 기간이 더 소요되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항공우주 관련 연구 쪽 박사과정에 있다. 공부에 상당한 재미를 붙인 형이다.) 그 형이 해준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자퇴’를 하고도 편입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는 점이었다. 한국평생교욱원이라는 국가기관에서 주선하는 학사를 취득하고 각 대학의 편입시험을 치르고 입학하는 방식이었다. 학교에 크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당시 얘기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이던 사건이 있었다. 2012년, 스무살 신입생 시절의 5월쯤 열린 학교 축제에서 서빙 등을 담당하게 되었다. 나름 들떠 친구들을 학교로 불렀다. 뭐라도 챙겨 주면서 어깨 으쓱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축제가 시작되었고 졸업을 앞둔 선배들의 서빙을 맡았다. 학생회 출신이었기에 나 역시 알고 있었고, 선배들은 정중히 나에게 음료수는 서비스로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 정도는 흔쾌히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카운터를 맡고 있는 2학년 선배들에게 4학년 선배들이 음료수 좀 줄 수 있냐는 데 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2학년 선배들은 5백 원짜리 음료수 하나에도 쩔쩔 매고 못 주는 시늉을 하였다. 마침 그 순간 멀리서 나에게 인사하며 밝은 얼굴로 오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난 여기서 수업도 제대로 들을 수 없고, 5백 원짜리 음료수도 마음대로 줄 수 없는 능력 없는 놈이구나’라는 사실을 느끼고 친구들을 바로 데리고 그대로 축제 현장을 도망 나왔다. 없는 살림에 자존심을 지키고자 친구들에게 치맥을 사주며 미안하다고 전했다. 어찌 보면 아주 작은 사건일 수 있지만, 꼬일 대로 꼬인 내 머릿속에서 당시 사건은 결정적인 'Tipping point’(방향이 전환되 결정적인 순간)였다. 자퇴를 하리라 결심했다.


여기에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당시 난 짝사랑하던 여자애가 있었다. 고등학교부터 멀리서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내 절친과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의 주선으로 다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가 주선되었고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20년 동안 연애는 고사하고(초등학교 때 교환일기를 쓰며 귀엽게 만난 친구는 제외) 여자애와 말 한번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던 나였기에 친해지는 방법도 몰랐다. 자퇴를 결심한 순간, 그 애에게 서툰 마음이라도 정하고 공부에 올인하자라는 마음을 먹었다. 갑자기 개인 메시지를 보내 잠깐만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몇 년이 지난 후에야 내 방식은 최악 중에 최악이란 것을 깨달았다.) 대뜸 고백을 했고 차였다. 친구들이 지금도 놀리는 흑역사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열등감과 불안감 지배한 20살의 상반기가 끝나갔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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