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한다슬 Oct 21. 2020

지금 또한 지나가지 않는 것들도 있더라

나는 씩씩한 크론병 환자입니다.<1>

솔로몬 왕이 즉위하기 전 왕자이던 시절, 솔로몬 왕자는 모시던 왕의 ‘큰 전쟁에서 이겨도 교만하지 않게 하며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도 용기를 낼 수 있는 글귀를 새긴 반지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솔로몬 왕자는 세기를 관통하는 명언을 제안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고등학생 시절, 치루 수술을 받았다. 수술 부위가 생각보다 커 '복합 치루'로 분류되었고, 수술 역시 치루 수술 치고는 규모가 제법 컸다. 의사 선생님은 제거한 환부를 보여주고는 고생했다고 다독였다. 생각보다 수술을 크게 했으나 최대 6개월이면 수술 부위는 회복할 것이라 말씀해주셨다. 처음엔 수술 부위에서 진물이 너무 많이 나와 생리대를 착용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치루 수술 환자 중 많은 분들이 초창기에 생리대를 착용한다고 했지만, 사춘기였던 나에겐 감추고만 싶던 부분이었다. 좋아하던 체육시간의 축구도 못하게 되었지만, 고맙게도 야간 자율학습(자율이라 쓰고 타율이라 읽는) 역시 병원 방문이라는 나름의 합리적인 명분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는 바로 좌욕을 실시했다. '6개월만 참자'라는 생각으로 인내심을 갖고 버텼다.


수업 시간 중 반을 이동해서 수업을 듣는 시간들이 있었다. 도넛 방석을 끌어안고 이동할 때 몇 친구들이 신기한지 본인도 앉아보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몇몇은 그 남자 또래 아이가 그러하듯 심한 말장난을 치기도 했다. 뭐 상관없었다. 난 6개월 후면 괜찮아질 테니까. 그렇게 1달, 2달, 3달... 1년이 흘렀다. 약속한 6개월은 진작에 지나갔지만 내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생리대는 착용하지 않았지만 쉬는 시간이면 늘 거즈를 대변보는 칸에 들어가 교체했다 어머니랑 수술한 병원 동네 병원을 찾아가 6개월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낫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의사의 답변은 '수술한 부위를 수술칼로 다 긁어내고 새살을 다시 돋게 하자'였다. 그동안 고생한 것을 옆에서 보신 어머니는 소위 '꼭지'가 돌았다.


"당신 내가 얘 데리고 큰 병원 데리고 가사 정밀 검진받게 할 건데 조금이라도 이 병원 실수인 게 나오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렇게 나는 서울아산 병원에 방문했다.

난생처음으로 방문한 서울아산병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서울 근교 구리시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서울 경험 자체도 없던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은 서울 병원 '클래스'에 놀랐다. 그냥 아파트 단지라 해도 무방한 규모가 병원이라니. 무조건 믿기로 했다.


약 8가지 정밀 검진을 받았다. 모두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위해 마셔야 하는 2~3리터가량의 물약이 그렇게 메스꺼울 줄은 몰랐다. 아무튼 검진 후 2~3주 정도 지나 다시 상담을 받으러 아산병원에 갔다. 나와 어머니 그리고 휴가를 사용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건강을 체크해주시는 예 교수님(실제로 아산병원 소화기내과 환자 상담 대기 공간에는 대기자 이름이 김식으로 하트로 뜬다.)이 계셨다. 한눈에 뵈어도 차분한 인상에 소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사람이었다. 말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음 우선 크론병이라는 건데 식도부터 항문까지 소화기관 어디서든지 염증이 날 수 있는 병이에요. 평생 관리해야 해요."


어머니의 초점은 단숨에 나갔다. 뭐라는 지 모르겠단 표정일 수도 있었고, 너무 놀라 넋이 나간 표정인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 역시 표정이 굳으셨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발견했으니 관리 잘하면 건강히 지낼 수 있을 겁니다.’라는 의사의 첨언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연예인 ‘윤종신 병’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인터넷에 검색해도 찾아보기 힘든 희귀 난치병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가족은 말이 없었다. 난 철이 없게도 '오 군면제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다.(실제로 군면제 대상이었다) 중간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차를 세우시고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펑펑 우셨고, 이내 아버지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의사 말로는 크론병의 원인은 아직 불명확(1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하다고 했고 유전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말에 부모님이 계속 마음 쓰였던 것이었다.


난 정말 괜찮았다. 오히려 부모님을 다독였다. 참고로 내 어릴 적 꿈은 대통령부터 영원한 젊음을 얻을 수 있는 약을 만드는 연구원까지 시시각각 달랐고, 꿈을 꾸는 순간만은 실제로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성장하며 내가 가진 꿈들은 현실과 타협하게 되었지만, 어릴 때만큼은 매우 긍정적인 아이에 속했다. 아주 만약에 운명이란 게 정해져 있어서 내 주변 사람 중 한 명이 반드시 크론병에 걸려야 한다면 난 그게 내가 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겨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도 어깨를 만져드리며, 난 정말 괜찮다고 말씀드리며 잘 이겨내 보자 말씀드렸다.


결과적으로 치루 수술을 진행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동네병원 의사가 지식은 있었겠지만, 본인 환자가 희귀 질환 중 하나인 크론병 환자란 것을 어찌 생각했을까. 다행으로 수술 부위는 긁어낼 필요가 없었고, 아산병원에서 약물 치료와 함께 3~4개월 후 환부는 모두 회복했다.(단, 크론병 관련 약은 평생 복용해야 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운동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야간 자율학습만큼 하기 싫었다. 어머니께 독서실을 다니고 싶다 했고, 내 상태를 아는 담임선생님 역시 허락해주셨다. 난 그 후로 방과 후 독서실을 다니게 되었다.


<2편에 계속>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