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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다슬 Oct 21. 2020

명분이 확실하면 '표창'은 아끼자

나는 씩씩한 크론병 환자입니다.<6>

동아리 인원 문제는 생각보다 열악했다. 당시 내가 들어간 영어 잡지사는 계절마다 한 권씩 잡지를 출판하는 ‘계간지’ 잡지사였다. 한 잡지당 짧게는 24p 길게는 36p까지 제작하는데, 한 페이지당 글자 수는 대략 5~700자였다. 기획 / 편집 / 조판 등 호흡이 긴 회의도 중간에 많을 뿐만 아니라, 영어 편집 자문을 위한 원어민 교수님의 첨삭도 잡지 제작 상 꼭 필요했다. 거기에 잡지 제작에 투입되는 모든 비용을 학생들이 직접 관해야 하고 예산도 천만원 단위인 꽤 규모가 있는 동아리였다. 한마디로 학교에 있는 동아리 중 규모도 큰 편에 속했고, 책임감도 막중했으며, 일도 무진장 많았다.


그에 비해 남겨진 인원은 2학기째 활동 중인 (지금은 둘도 없는 사이가 된) 남자 학우, 그리고 나랑 같이 들어온 여자 학우 이렇게 끝이었다. 다행히 직전 학기에 퇴임한 책임감 강한 선배가 우리 일을 도와주고는 있었지만, 해야 하는 일에 비해 열악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은 내가 원했던 환경이었다. 주인의식을 갖고 헤쳐가지 않으면 동아리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이어서 활동 하나하나에 더 몰입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집중하는 것은 내가 바라던 상황이다. 다행히 함께한 친구들도 열정이 가득한 친구들이었고, 대학생활의 방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다시 나 자신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시작한 대학 영어 잡지사 생활로 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첫 인터뷰 대상이었던, 도자기 공예가부터 국립박물관장,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학교 총장님, 소설가 등을 비롯한 다양한 학교 구성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편입생으로서 학교에 적응하기에 최고의 기회이기도 했다. 오래된 동아리 역사로 굵직한 선배층과 동아리 특성상 다양한 학우를 만나야 하는 점 등 학생 기자 활동은 발을 넓히기 좋은 기회였고, 편입 공부할 때만큼이나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또한, 혼자 하는 활동이 아닌 동료들과 함께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야 활동이라 더 재밌기도 했다.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터뷰이는 약속을 어길 때도 있었고, 취재기사의 시의성이 급격히 떨어져 기사를 다시 써야 한다던가, 이듬해 들어온 후배들이 타이트한 일정으로 동아리 탈퇴를 하는 등의 인원 변동 등 늘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 또한, 영어 잡지사 특성상 내가 속한 동아리엔 영어를 잘하는 선후배/동기들이 매우 많았다. 내 동기만 하더라도 영어 에세이 전형 수석 입학한 사람이었고, 대다수가 외고 출신이었으며 중고등학교를 해외에서 다닌 친구들도 상당수였다. 반면 나는 한국의 입시 영어로만 영어실력을 길러왔고, 작문도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동아리 구성원에 비하면 형편없었다.한 선배는 내 영어실력이 너무 저급하다며 대놓고 ‘디스’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당시 난 활동 자체에서 주는 몰입감과 성취감에 빠져있었기에, 나의 잡지 제작 달성을 위해서는 감정적인 공격이나 비난들은 모두 수용할 수 있었다.


동아리 입부 당시 난 3학기만 다닐 것을 약속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편입학은 3학년부터 시작이기에 입학 후 2학기만 지나도 공식적으로 4학년이었다. 당시 입부한 게 1학기가 지난 시점, 즉 3학기만 남은 시점이기에 나는 어쩔 수 없었고,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동아리 입장에서도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명분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활동기라 할 수 있는 3학기 시점 나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교내 언론사 동아리 5개의 연합회장 선거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던 것이었다. 2학기 재직 이상의 언론동아리 회원이면 참가할 수 있었던 당시 선거에 나의 동아리 동기이자 편집장이었던 친구가 나에게 회장직 출마를 제안했다. 난 경제학을 복수 전공하고 있었기에 언론사 연합회의 회장직에 당선된다면 졸업연기는 필수였지만, 난 이왕 시작한 거 큰 역할로 마무리해보고자 결심했다. 동기가 많이 도와줬고, 당선됐다. 편입생으로는 당연히 처음이었다.


당시 학교 내 언론동아리는 인쇄매체 3개와 영상매체 2개가 있었다. 개수로는 인쇄매체가 많았지만 인원으로 따지만 세 개의 인쇄매체 동아리를 합쳐도 하나의 영상매체 동아리보다 인원이 적었다. 영상매체는 가용인원이 많다 보니 연합회 임원 출마에도 적극적이었던 반면, 콘텐츠 발간에도 인원이 부족한 인쇄매체는 동아리 연합 발전에 대한 관심이나 임원 출마 등에 흥미가 없었다. 거꾸로 얘기하면 영상매체, 그중 규모가 더 컸던 한 영상매체 동아리가 연합회 자리를 독식해왔다.


회장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각 동아리 대표를 만나 일대일로 대화를 나눈 거였다. 그러던 중 한 인쇄매체 대표의 흥미로운 제보를 받게 되었는데, 과거 내 자리에서 일하던 전임자가 연합회 공금을 자신의 소속 동아리를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우선 누가 알고 있냐고 물어봤는데 본인 정도만 알고 과거 그 전임자와 일했던 총학생회 임원들은 알 거라고 했다. 동아리 연합의 분열 방지를 위해 나만 알고 있겠다고 하며, 앞으로 회장으로서 5개 동아리 대표 회의를 할 때마다 예산 사용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당시 규모가 있는 학생 집단은 모든 학우가 자율적으로 참석할 수 있는 ‘예산 공개회의’에 출석해서 예산 사용내역을 발표하고 학우들의 질의에 답변해야 했다. 본래 학생의 등록금으로 운영되는 집단이기에 당연했다. 그러던 중 한 영상매체 대표, 정확히는 원래 내 자리를  독식해온 동아리 대표가 자신이나 자신 동아리도 참석하고 촬영해도 되는지 물었다. 물론 당연히 가능했다. 다만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매번 회의 때마다 주차별 예산 사용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해온 나이 기도했고, 예산 관련 회의는 꽤 정기적인 미팅에 속했기에 언론동아리에서 보도할 때 보통 줄글로 짧게 내보내 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예산 공개하는 과정에서 의심을 드릴만한 부분이 있었나'라고 솔직히 물었다. 해당 대표의 답변은 ‘과거 회장들이 예산을 마음대로 썼다고 들었는데, 그 점이 미심쩍고 파헤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예산 공개회의는 예산 사용내역을 공개하고 질문에 답을 하는 자리이다. 그 과정에서 의심 가는 내용이 있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질타받고 시정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동아리는 날 깎아내리고 공격만 하기 위해 내가 회의 때마다 공유한 내용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난 차분하게 그 공금 유용 전임자가 누군지 아냐고 물었다. 그 대표는 꽤나 시니컬한 어조로 '나야 모르죠, 근데 여기저기 제보가 많더라고요' 했다. 그 무렵 난 그 전임자의 프로필이나 히스토리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해당 전임자는 지금 대표의 선배였고, 연합회 공금을 자신의 영상매체 동아리 장비 구입 등 혐의로 회장직 박탈을 당했다. '해당 전임자는 당신 00학번 선배고, 자격 박탈당한 사실도 모르느냐. 난 당선 직후 많은 제보를 받았지만 내 임기 동안은 서로 윈윈 하며 성장하길 바래서 해당 제보를 묵인했는데, 당신은 지금 본인 동아리 이권만 챙기려 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단, 나도 그러겠다'라고 강하게 말했다.


당시 난 정말 두려운 게 없었다. 자금운용은 학교 측 교직원과 늘 상이하고 수시 보고를 통해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하려 했고, 상대측의 약점도 내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저 통화 이후 해당 동아리는 내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공손함도 조금은 생겼다. 가장 길들이기 힘든 동아리를 완전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이 일 덕분에 내가 하고자 하던 사업이 수월하게 진행됐다.


100명이 넘는 언론 동아리 회원과 함께 언론사 페스티벌이라는 축제를 열기도 했고, 학업과 매체 편집으로 철야 작업이 많던 언론 동아리지만 학교 측의 제재로 밤 10시까지만 쓸 수 있던 편집실도 24시간 개방하는 프로젝트도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었다. 특히, 24시간 편집실 개방은 모두의 협조 덕분에 가능했다. 편집실 이용제한으로 언론동아리 부원은 각자의 편집실에서 불을 끈 채로 철야작업을 하거나, 발각되면 총학생회실, 연구실 등 특수한 공간에서 몰래 작업을 해야 했다. 이런 근무여건은 꼭 개선하고 싶었지만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모든 언론사 회원이 ‘딴지’ 걸지 않고 많이 지지를 해주었고, 불편사례와 문제 해결방안 등을 담은 10장의 기획서를 만들 수 있었다. 학교 측과 협의하여 음주 등의 불건전한 행동이 편집실 내에서 발생 시 즉각 권한 회수라는 조건 하 24시간 개방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시기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명분’이 확실한 행동은 손해 볼 일이 없다는 것과 ‘표창’은 아끼자는 것이다.


당시 난, 내 임기 동안 나의 스펙 한 줄 보다는 순수하게 언론 동아리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물론 처음엔 큰 역할을 맡아보고 싶은 감투에 조금 더 끌렸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당선된 후엔 나에게 투표해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어떤 게 도움이 학생들에게 필요할까를 중점적으로 생각했고, 이것을 위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우리 학교 언론사 현직 선배를 만나 PD, 방송/신문기자, 사진기자 등 다양한 언론사 선배들을 초빙해 강연을 열기도 했다.


또한 앞서 말했지만, 회장 당선 초기 접한 타 언론사의 불편한 진실은 나에게 분열만 조장할 것으로 예상되어 마음속에 묻기만 하려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묻어둔 진실은 나에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확실한 ‘표창’이었고, 또 그 표창으로 원하던 바를 달성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절대 아니었으나, 앞으로의 인간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남의 약점을 섣불리 사용하지 말 것. 나름의 처절한 교훈이었다.


원하는 목표에 철저히 집중하고, 인간관계는 최대한 심플하되 진실되게 가져갈 것. 내가 이 시기 배운 '나를 지키는 행복의 조건' 중 하나였다.


<7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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