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한다슬 Oct 21. 2020

검은 그림을 그리는 이유

나는 씩씩한 크론병 환자입니다.<7>

대학생 시절, 난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아동과 후원자 간의 교류 서신을 번역하는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막연히 살과 살이 부딪히는 봉사를 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마침 맡고 있던 동아리 임원 임기가 끝나갈 무렵, 학내 캄보디아 해외 봉사단을 모집하는 것을 보았다. 그 공고를 봤을 때가 23살 가을이었는데, 난 제주도도 가본 적이 없어서 비행기 타본 경험이 없었다. 비행기도 탈 수 있고, 해외 봉사할 기회도 주어지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봉사단 면접을 보았고, 세이브 더 칠드런 하면서 느낀 봉사에 대한 열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봉사단 선발 면접은 쉽게 통과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약 한 달 동안의 열악한 캄보디아 생활로 인해 경쟁률이 거의 1:1이었다.


2015년 10월, 학생봉사단 10명 선발 완료 후 12월까지 1달간의 캄보디아 일정을 조율하고 규칙 등을 합의했다. 당시 우리는 2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봉사단 리더였던 수사님과 학생 리더였던 비들이라는 사람과 일정 정리를 하는 서기 외 핸드폰은 모두 한국에 두고 가는 것이 첫 번째 규칙이었다. 짧은 기간이 아닌 만큼 핸드폰이 개별로 있다면 누군가는 분명 단체 생활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 하에 첫 번째 규칙에 모두 동의했다. 두 번째 규칙은 저녁마다 그날 있었던 소회를 나누는 ‘나눔’ 자리를 갖는 것이었다. 짧던 길던 그날 있었던 소회나 불편 한점 등을 미리 공유하여 건강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남은 시간 캄보디아 기초 언어와 역사 등을 공부하고 이듬해 1월 2일 캄보디아로 출발했다. 처음 비행기가 이륙할 때 정말 떨렸는데 그 후론 그냥 시끄러운 지하철 같은 느낌이었다. 안전하게 도착했다.


당시 우리 숙소는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 근처에 장애인 기술학교인 ‘반티 프리 엡’이란 곳이었다. 80년대까지 내전과 베트남과의 전쟁으로 캄보디아 국민 중엔 장애인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술/기초교육 등을 가르쳐 재사회화 프로세스를 지원하는 곳이었다. 특이한 점은 단순히 교육만 이뤄지는 곳이 아닌 ‘기숙학교’이기에 학생들이 먹고 자는 숙식의 행위가 이뤄졌다. 즉, 현지인 중에서도 내전으로 인해 상처 받은 소외계층이 사는 곳이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 눈을 뜨면 천장에 도마뱀이 지나갔고, 새벽엔 알 수 없는 곤충과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화장실 물은 석회질로 흰 물질들이 둥둥 떠있어서 그것을 걷어내고 샤워를 해야 했다. 또 변기엔 거미줄이 항상 쳐져 있어서 그 석회질 물을 한 바가지 크게 뿌려서 거미줄을 치워야 했다. 도착 이틀 만에 크론병으로 장이 민감한 나는 물갈이를 크게 했고, 그 뒤로 물은 항상 사 먹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게 좋았다. 한국에서만 살던 내게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맑은 공기가 맘에 들었다. 농업 교육 과정 중 하나인 텃밭 가꾸기 수업 준비를 위해 쌓아 진 흙을 하루 종일 평평하게 다듬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뙤얓볕에 하루 종일 일한 후 ‘득 또꼬 도꼬’라는 캄보디아의 달달한 아이스 연유 라테 한잔을 마시고 찬물 샤워를 한 뒤, 저녁 회의를 위해 모이던 현지 신부님 숙소에서 선선해진 저녁 공기를 마시면 한국에 있을 때 있던 근심이 사라졌다. 캄보디아 도착 후 열흘 정도는 반티 프리 엡 안에서 이런 식으로 손발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단순노동 봉사를 했다.


안보이던 사람들이 반티 프리 엡에 있자 많은 현지인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두었다. 우리가 일하는 시간은 그들에겐 수업시간이기에 교류는 없었지만,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면 늘 우리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구경했다. 그러다 일이 너무 많아 보이면 밝은 미소로 우리를 도와주고 함께 물건이나 흙을 옮겼다. 특히 가장 좋았던 건 낮잠 시간이었는데, 나는 당시 점심을 간단히 먹고 적당히 그늘진 돌담을 찾아서 낮잠을 잤다. 내가 낮잠을 자고 있으면 어느샌가 캄보디아 현지인들이 날 둘러싸고 그들끼리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대화를 했었다. 그러다 내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면 꺄르륵 웃으면서 날 봤고, 캄보디아어로 안녕이란 뜻인 ‘쯥닙수어’라고 하면 그들은 더 크게 웃어주면 똑같이 대답해줬다. 일과 마무리 시간과 저녁 먹기 전 잠깐의 시간에 함께 축구나 농구를 하는 것도 행복한 기억이다. 다리나 팔이 없는 친구들이었지만 항상 밝고 최선을 다했다. 마음 따뜻한 시간들이었다.

NHCC 로고, 캄보이아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로고가 많다.

열흘이 지난 후에는 NHCC(New Hope for Cambodian Children)이라는 보육원에서 봉사를 했다. 최빈국 중 하나인 캄보디아엔 HIV 바이러스 보유자가 많다고 한다. 이것이 악성적으로 발현되면 AIDS(에이즈)가 되는 것인데, 여기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에이즈로 죽고 본인들도 HIV 바이러스를 갖고 있었다. 에너지 넘치고 마냥 해맑기만 한 아이들이 몸속에 시한폭탄을 갖고 사는 게 마음 아팠다. 그러던 중 지본이라는 미술 선생님을 만났다. 지본의 나이는 20살로 그 역시 NHCC 출신 고아였다. 지본의 미술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연필이나 볼펜만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그림 안목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정말 멋졌다. 그러던 중 하나 의구점이 생겼다. 모든 그림이 검은색이었던 것이다. 연필이야 흑심을 많이 쓰니 그럴 수 있었지만, 볼펜도 검은색만 사용하였다. 지본에게 검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물었다.


“난 어릴 때 인생은 불행하다고만 생각했다. 나에게 있었던 건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과 혼자 남은 나였다. 나를 위로해줄 건 그림밖에 없었는데 그림으로 그런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게 난 우울한 세계를 표현하려고 검은 그림만 그렸다. 그러나 나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고 오히려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난 행복과 슬픔은 별개가 아니고 늘 공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역시 질문의 검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듣기 전까진 무의식 중에 지본의 인생이 가혹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환경은 지본의 예술혼을 더욱 불타게 해 주었고, 또 그 예술을 통해 다른 이의 삶을 위로해 주었으며 그로 인해 자신도 위로받았던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이었다. 이 교훈의 임팩트는 정말 오래갔다. 귀국 후 5년이 지난 후 고민많은 사회초년생인 시절 회사에 휴가를 내고 캄보디아를 재방문해 지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여전히 참 멋진 청년이었다.


5시 40분 기상, 오후 5시까지 봉사 후 그날 있던 소회를 봉사단원들과 나눈 후 숙소에서 일기를 쓰면 잘 시간이었다. 하루하루 느낀 감정에 충실하며 한 달의 시간을 보냈다. 캄보디아에 봉사를 하러 간 건 나였지만, 돌이켜보면 선물을 받은 것은 되려 내쪽이었다. 10대 후반 생소한 질병을 갖고, 20대 초반 알 수 없는 열패감에 휩싸여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았다. 그 불길은 나를 계속 예측치 못한 다양한 활동으로 이끌었다. 캄보디아에서 느낀 점은 난 늘 현실에서 안 좋은 점만을 보고, 행복은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볼품없을 때도, 조금 봐줄 만했을 때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보장되지 않는 나중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늘 담보로 살았다. 하지만 현실의 담보대출은 확실한 매물이라도 구매할 수 있지만 이 행복 담보대출은 어느 것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며 현실에 충실할 것. 캄보디아가 준 큰 선물이었다.


<8편에 계속>


이전 06화 명분이 확실하면 '표창'은 아끼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