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0월 16일
금일 처리하여야 할 결재 서류의 팔 할을 마쳤소. 그것은 필시 수직 낙하하는 사과와도 같은 이치라 할 것이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중력의 법칙이듯, 나의 일이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것은 태초부터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이오. 내 막간의 짧은 틈을 빌려 이 글을 보내오.
오늘은 유달리 손에 일이 잡히지 않네. 아마 그대가 한 말이 고철덩이처럼 가라앉아 나를 눌러버린 까닭일 것이오. 무엇보다, 사과를 하고 싶네. 진심으로 말이오.
그대에게 키가 작다고 표현한 것은 명백한 나의 실수였소.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변명하고 싶으나, 좋지 않은 궤변일 것이오. 그대의 분노를 예상치 못하였던 나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네. 떠날 즈음의 인색한 표정을 보았을 때, 내 언행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음을 그제야 직감했소. 내 겉모습이 그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지, 자꾸만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소만. 성급한 질문들과 불필요한 행동들이 상처가 되었다면 다시금 미안하다 전하오.
허나, 반드시 말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소.
어린 시절, 나는 도시를 동경하였네. 시골 산동네 해발 육백 고지에서 따먹던 오디와 복분자가 영 싫었소. 내가 바란 것은 그 너머의 세상이었던 것 같소. 어른들이 한적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때, 나는 정반대의 꿈을 꾸었소.
처음 서울에 상경했을 때, 나는 숨 막히는 부대낌을 원하고 있었네. 땅거미가 내려앉아도 건물마다 창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은 별과도 같았고. 그 속에서 사람 하나, 집단 하나, 가족 하나가 어울려 사는 모습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소. 그러나 동시에 가슴은 두근거리곤 했소만.
사람들과의 만남은 기대 이상이었소. 첫 직장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이유 없이 욕설을 들은 적도 있었소만. 허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소. 나를 도와주는 이도 있었고, 매혹적인 사람도 만났네. 내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는 친구의 농처럼 - 땅에도, 하늘에도, 사람들이 빨래처럼 널려 있었소.
그러나 내 것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제아무리 값진 보석이 눈앞에 있다 한들 내 손에 쥘 수 없다면 빛 좋은 개살구요, 그림의 떡일 따름일 것이오. 그러하니 나는 내 사람을 가지기 위해 애써왔소. 인간관계가 수지타산의 장부처럼 맞아야 한다는 내 사고가 혹 엽기적이라 하여도 개의치 않겠소. 나는 그대를 원하오. 그대 또한 나를 원한다면 나를 가져가시게나.
도시에 올라온 까닭은 실로 단순하오. 그대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곁에 두고 싶었기 때문이오. 이는 어쩌면 가족의 결핍에서 비롯된 인정욕구일 것이나, 더 이상 감추려 하지 않겠소.
나는 이렇게 믿네. 사람들이 서로 말을 나누어야만 같음과 다름, 옳음과 그름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그대가 속이 상해도 침묵한다면 내가 어찌 그대 마음을 알겠는가. 나는 독심술사가 아니오. 말주변조차 서툰 자이니, 더욱 맞물림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네만.
그러니 속상한 것이 있다면 표현해 주시오. 나는 귀와 눈을 열어 기꺼이 듣겠소. 나의 가장 큰 관심은 오롯이 당신을 관찰과 분석하는 것이오. 그대가 드러내는 모습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음미하겠소. 그러니 단 한 글자라도 좋으니, 진심을 외면하지 말고 표해 주시게.
신장이 작은 것에 화가 났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오. 다만 그 연유를 단번에 다 알 수는 없을 것이오. 나는 그만큼 영민하지 못하니, 그대가 허락한다면 차차 알려주길 바라오.
혹여, [---------------------------------------------] 그대가 차후에도 내게 연락을 잇고자 한다면 답장을 꼭 주게.그대의 토끼같은 검은 눈동자만 아른거리는구료.
이제 시간이 부족하니 연필을 거두겠소.
내 바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