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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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거짓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 말이 거짓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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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거울 -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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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존재하는 아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Donald Winnic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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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며 누군가에게 의존을 해야 한다.
갓난 아이가 마치 엄마의 따듯한 품을 필요로 하듯이, 삶에 있어서 동반자와 같은 친구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애인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될 수가 있다.
내가 살면서 보았던 많은 경우에는 가장 가까워야 할 사이여야 할 가족끼리 가장 큰 상처를 준 경우를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다.
인간은 마치 거울처럼, 타인은 나의 행동에 대한 반응을 해주며 나의 행동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내가 만약 과하게 성적인 농담을 던졌을 때에, 친구의 반응이 좋지 못하면 그것을 하면 사회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걸 깨우칠 수 있다. (누군가를 다른사람 앞에서 성적인 비하를 하는 것은 매우 좋지않은 행위이구나!)
특히나 배움이 필요한 어린아이의 경우, 부모가 그러한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는 아이 자신뿐만이 아닌 자신이 볼 수있는 세계를 나타내주는 하나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당신이 만약 부모라면 완벽한 거울이 될 필요는 없다.
다만 적당히 좋은, 이만하면 충분하다라고 할 수 있을만큼 적절히 현실과 타협한 거울이어야한다.
완벽하게 아이의 장점과 단점 하나하나를 손찌검하며 가르치는 (마치 모든 모습의 하나부터 열까지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완벽한 거울일 필요는 없다.
적당히 더러워져서 나를 깔끔히 볼 수는 없더라도 좋다.
내가 어떠한지, 어떤 모습으로 남들에게 보일지 정도로만 알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부모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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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누구에게는 좋은 아들로써, 누구에게는 멋진 아빠로써, 누구에게는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으로써,
어찌보면 이것을 상황에 따라 우리는 우리 모습을 일부를 감추고 가면을 쓰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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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따라 유도리있게 나를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학교에 있을때는 성실히 공부를 하는 학생이 된다.
집에서는 엄마와 아빠를 기쁘게 하는 효자가 된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즐겁게 농담을 하는 멋진 인기있는 인싸가 된다.
허나 가면쓰는 것에 심취하여 그것을 벗을 수 없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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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하는 연기자들은 정말이지 휘황찬란하고 극적이게 무대를 연설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어쩔때는 숨이 멈추고, 같이 몰입이 된 듯 기뻐하기도 하며 즐거움을 얻는다.
하지만 그런 연기자들 조차도 무대가 끝나면, 가면을 벗고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고 휴식을 취한다.
만약 내가 남들을 위해서만 살아오는 인생을 산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아마 평생을 연기하는 연기자의 삶이 될 것이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내 진심을 거짓인 듯 연극처럼 극적이게 표현하는 삶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삶은 공허하고 극도로 비참할 것이다.
학교에서 만약 인기 있는 교수가 있다고 해보자.
교수는 학술적으로 매우 권위적인 교수이며, 그 분야의 종사자라면 알 만한 유명한 사람이다.
그 사람의 수업과 세미나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허나 그 사람이 친구들 앞에서도 교수의 가면을 쓰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족들 사이에서도 교수인 것마냥 행동한다면 가족들의 기분은 어떨까?
평생을 교수의 가면을 쓰고 산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진짜 인간관계에서 '교수'가 아니라면 그 사람을 인정해주고, 알아주고 사랑해줄 수 있을까?
툭 터놓고 말해서, 그 사람이 진짜 친구나, 진짜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사람 한명이나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어느정도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과 가면을 안 쓰고 살 수는 없다.
한 가지의 거짓말도 못하는 사람도 정말 어리숙한 사람일 것이며, 백 가지가 넘는 가면을 번갈아 쓰는 사람도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문제는 균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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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대에 와서 이런 발언을 해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들, 즉 거짓말을 못하고 가면을 안 쓴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지체없이 정신병원이라 할 것이다.
최근에는 정신병원에 대한 호칭이 다양해진 것 같다.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신과에 다닌다고 하면 무언가 측은한 시선을 보낸다.
또는 자신의 일반화에 확신을 가질수도 있겠다.
(거 봐! 저놈 이상한 놈인줄 알고 있었다니까! 내말이 맞았어!)
나는 정신과에 의뢰되어 병원에 다닌지 꽤 오래 되었다. 기억이 흐릿하게 잊혀질 정도다.
아마 1년은 훌쩍 넘었고 2년 가까이 되가지 않을까 싶다.
정신과에 의뢰된 이유는 양극성장애가 의심되어 의뢰가 되었는데, 진단명은 강박장애가 되겠다.
(오늘 다루고 싶은 논점은 이것이 아니다.)
정신과에 자주 갈때마다 다양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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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내가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걸 부정할까봐 무서웠다.
마치 의사가 "너 꾀병이구나?"라고 말할 것만 같은 느낌이라 해야 좋을까?
이것은 정신과가 아니더라도 다들 그렇지 않은가?
감기로 인해 무언가 기분이 나빠지고 열이 오르면 다음날에 병원에 가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리고 정작 병원에 가면 몸이 이상하게 괜찮아진 기분이 들면서도 증상이 그때보다 상당히 호전된 것만 같아 보여서 나의 아픔이 얕잡아 보일것만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닌데, 혼자 자취하면서 생활할때에 배꼽 아래에 극심한 복통이 있었다.
이것은 분명 몸이 잘못된 것이 분명했고, 의학적으로 신체기능이 무언가 망가진 기분이였다.
걷기가 힘들고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119를 불러야 하나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119를 불러야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괜찮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또 119 구급대원 분들이 바쁘실텐데 시간을 나한테 그렇게 할애하신다니 참 그분들을 수고스럽게 하는거 같기도 하고말이다.
일단 근처의 응급실 까지 걸어가게 되었는데(그때가 새벽에 가까운 저녁이었다.) 기본 진료비가 8만원 가까이 된다고 들었다.
그때 당시에는 8만원이 피같이 번 아르바이트 비용을 지출할 수 없기 때문에(당시 시급이 8250원이었으니, 10시간을 뺏기게 되는 셈이다.) 아침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아침에 병의 증세를 약사에게 말하며 2천원짜리 소화제를 받았다.
어찌보면 내 문제에 대하여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셈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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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꽤나 비참했다.
당시에 아팠던 것을 토로하기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이것을 동정해주는 사람이 돈을 주고 진료받는 의사선생님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돈으로 맺어진 일시적인 관계에서만 동정을 받을수 있다니! 참 비참한 일이 아닐수 없다.
거지는 돈을 받으면서 동정을 받는데, 되려 나는 돈을 주고 동정을 받은셈이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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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속상했던 것이 컸던 듯 했다.
항상 병원에 가면 보호자와 함께 다들 병원을 찾아오던데, 나는 병원에 갈때 항상 혼자서 갔던 것 같다.
부모의 핀잔이든, 친구들의 장난이든, 누군가는 항상 곁에 대리고 오던데 나는 항상 혼자 대기실에 몇 십분 그들 사이에서 앉아있자니 기분이 퍽으로 묘했다.
어찌보면 내가 삶을 살아오면서 항상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려는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반대로 말하면 내 곁에 누군가 지지해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증거같기도 해서 참 섭섭했다.
신은 사람에게 각자에게 알맞는,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 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거 같다.
내 인생의 여정에 있어서는 길이 고될지언정 내가 두 다리로 열심히 걸어가면서 강하게 살 수 있도록 삶이 정해진게 아닐까 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