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순간
가을의 끝자락, 고등학교 1학년.
합주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오후 햇살이
바이올린 케이스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하연은 활을 쥔 손에 천천히 힘을 줬다.
오늘은 새로운 학기 첫 합주 날.
작은 긴장과 익숙한 설렘 사이,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들이 공간을 가볍게 메우고 있었다.
그러다 문이 열렸다.
조용히, 그러나 어딘지 다른 기척.
모두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지만,
하연은 활을 멈춘 채 고개만 살짝 돌렸다.
그가 들어왔다.
검은색 후드, 다소 큰 첼로 케이스,
굽히지 않은 어깨와 묵묵한 걸음.
그 소년은 한마디 말도 없이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오늘부터 우리 오케스트라에 함께 하게 된 첼로 파트, 은결이야.”
지휘자의 소개는 간단했고,
그 소년도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은결.’
그 이름은 부드럽게 떨어졌지만,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하연은 바이올린을 든 채,
다시 연습에 집중하려 했지만,
은결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말이 없었다.
대신 손끝으로 악기를 감쌌다.
천천히, 아주 조용히.
현을 고르고 활을 준비하는 손동작엔
낯선 공간 속에서도 자기만의 리듬이 있었다.
그건 마치,
누군가를 안아본 사람이 가진 조심스러움 같았다.
닿되, 상처 내지 않으려는 몸짓.
합주가 시작되었다.
하연은 악보 위를 따라갔고,
자신의 소리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왼쪽 어딘가,
은결의 첼로에서 나오는 낮은음이
계속해서 그녀의 귀를 건드렸다.
그 소리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고,
매끄럽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침 속에서 무언가 진짜가 들려오는 듯했다.
숨어 있는 말들, 감춰진 표정들 같은 것.
합주가 끝났을 때,
하연은 평소처럼 바로 케이스를 열지 않았다.
가방을 덮으며
천천히 은결 쪽을 바라봤다.
그는 조용히 현을 닦고 있었다.
혼자만의 동작, 혼자만의 호흡.
하연은 마음속에서
그 이름을 한 번 더 되뇌었다.
‘은결.’
말을 걸진 않았다.
그저 한 번 바라봤고,
그 순간이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았다.
다음 날,
그가 연습실에 조금 일찍 도착하는 것을
하연은 우연히—그러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연은 서서히 그의 소리를 기억해 가기 시작했다.
이름도, 말도 없이
음과 눈빛으로 시작된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