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가까워야 하지만 멀고 싶은 곳
저는 어딘가를 가거나, 누군가를 만날 때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MBTI가 "I"라서 일까요? 아무래도 낯을 가리기도 하고 말을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는 어색한 분위기로 휩싸여 있는 게 싫어서 제일 말을 많이 하고 자학개그를 통해 아이스브레이킹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과의 대화를 할 땐 눈을 꼭 보며 대화를 하려 노력합니다. 스마트폰을 자주 하는 요즘 눈이 다른 데로 가는 걸 어쩔 수 없지만 일을 할 때나 주요한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이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하기 위해서 모든 신경을 쏟게 됩니다. 아마도 가장 조용히 상대방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이해하고, 기억하려 노력하는 건 바로 병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 아이가 수술을 해야 할 때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는 시간만큼 짧게 느껴지는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약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기다리는 병원은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은가 싶을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프고, 아픈 걸 고치고, 자주 검사하며 또 나빠지지는 않는지 보고 말이죠. 각 과마다 특정 나이대가 있는 것 같아요. 어린이 병원에는 어린이들이 , 산부인과에는 젊은 여성과 남편들이 있듯이 말이죠. 제가 가는 병원에는 대부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보호자로 오는 아들 딸 조차도 저보다 나이가 더 있으신 분들로 보입니다. 만 35세, 암병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두 단어가 만나 제가 진료실에 들어갑니다. 제 앞에, 뒤에 들어 가시는 분들은 저희 아버지 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셨는데 말이죠.
보호자로 들어갈 때의 진료실과 환자로 들어가는 진료실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의사 선생님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고, 처음에는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지 않고, 힘들기만 하더군요. 그리고 정신 차리고 있지 않으면 진료실 안의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의사 선생님은 주요한 몇 마디만 해주는데 앞뒤, 백그라운드 지식 없이는 이해하기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거기다가 궁금한 게 있어 물어보기라도 하면, 그런 걸 물어보나?라는 식의 답변이라 던가 뭐 그러그러합니다. "자 이제 나가 계시면 안내해 드릴게요~"로 나가기를 재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래서, 진료실을 들어갈 때마다, 어떤 걸 물어볼지, 무슨 의미인지 사전 준비를 하곤 합니다. 하지만, 다 말하지 못하거나, 괜히 말했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저는 하루에 두 개의 과에 진료를 받는데요, 그래서 진료실에서의 의사 선생님 모습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유추해 볼 수 있었습니다. 빠르게 빠르게 처리하려 하는 분들의 진료실 앞 대기실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의 환자들이 계속 방문합니다. 어느 때는 앉아 기다리기도 마땅치 않을 때가 있죠, 반면 친절하고 천천히 들어주시고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의 경우에는 (물론 상대적이지만) 하루의 진료 인원 수가 그리 많지 않아 보였습니다. 물론, 시간 때 일정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의사 선생님들 개개인의 차가 일단은 제일 큰 것 같습니다.
이제 막 1년 반 정도의 기간 동안 3개월에 한 번씩 그리고 시술 두 번, 치료 두 번 그전에 아들의 수술까지, 한 병원에 다니다 보니 미로 같은 대형병원의 위치를 요리조리 다니고 있습니다. 리모델링도 생각보다 자주 하고 사람은 진짜 많더군요. 방문할 때마다 1층 카페에 멤버로 등록해서 포인트를 쌓았으면 엄청 쌓았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자주 가는 곳이지만, 자주 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그만큼 잘 아는 곳이지만 아직도 병원을 갈 때면 생각이 멈추고 몸이 굳고 심장이 떨립니다. 자주 가지만 적응할 수 없는 곳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묵주 반지를 손에 끼거나 아이들이 만들어준 행운의 상징을 들고 병원을 갑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같이 가는 보호자가 정말로 큰 힘이 됩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을 둘이서 듣고 어떤 말인지 해석할 때 물론 큰 힘이 되지만, 손을 잡고 걷기만 하더라도, 나란히 같이 앉아있기만 하더라도, 기다림에 지쳐 각자 핸드폰을 하더라도,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 고민이 있습니다. 감기나 작은 병으로 방문하는 병원에서도, 떨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병원이라는 곳이 제게 다가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생각되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집 가까이에 아주 친절하신 의사 선생님을 만나 편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병원이라는 곳이 주는 불안감은 떨쳐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옆에 손을 잡고 같이 걷는 사람이 있기에 문제없이 다니고 있답니다. 이번 달에도 큰 병원을 다녀왔는데요.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내용에 대해서, 젊은 분들이니 검색은 좀 해보셨죠?라고 다가오는 간호사님의 말은 더욱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고려하지 않았던 내용이고, 병원에서 직접 듣는 것과 인터넷의 바다에서 내용을 찾아보는 것과 같을 수는 없으니 말이죠.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듣고,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결정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겐 오늘 처리해야 하는 업무 중에 하나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생 일대의 충격이기도, 큰 결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 힘듦을, 아픔을 나눠주지는 않아도 되지만 조금만 더 길고 자세한 설명이 있었으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이야기보다는 뭔가 애매모호한 입장에서의 애매모호한 답변을 받을 때면 이 사람이 지금 빠져나갈 길을 만드는데만 신경을 쓰는 건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항상 밝게 응대하시고 4~5개월 만에 만난 환자가 살이 빠진 것까지 알아채시는 의사 선생님들 간호사님들을 만나면서 가슴속이 간질간질 해지는 기쁨을 느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일 하는 사람도, 방문하는 환자와 보호자도 병원이라는 곳, 진료실이라는 곳은 적응할 수 없는 공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주 가는 공간에 대한 익숙함, 의료진들과의 교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와이프와 함께 슬기롭게 헤쳐 나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