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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Feb 07. 2024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컵라면을 먹는다는 것

그 어려운걸 아이가 해냅니다

나의 초등 시절에는 학교 끝나면 학교 앞 작은 문방구나 구멍가게를 꼭 들르는 게 루틴이었다. 말이 문방 구지 문구류도 팔고 문제집도 팔고 과자, 음료수도 팔고 달고나도 만들 수 있고 심지어 봄에는 병아리도 팔았다. 등하굣길에 그 문방구를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는 것 같다. 혼자 갔는지 친구들이랑 함께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매일 그곳을 들르는 게 삶의 낙이었다는 느낌은 남아있다.


요즘은 그런 문방구 역할을 편의점이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동네 편의점을 둘러싼 인물들 간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불편한 편의점> 같은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니, 이쯤 되면 이제는 24시간 편의점이 평범한 사람들의 쉼터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했음은 틀림없다.



편의점은 학생들에게도 만남의 장소다. 집 앞 편의점에는 늘 학생들이 모여 컵라면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초4인 조카가 학교 끝나면 늘 친구들이랑 편의점에 들러 다 같이 둘러앉아 컵라면 하나 해치우고 오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요새 초등학생들에게는 편의점이 예전의 구멍가게 역할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조카의 일상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아이는 살아생전에 하굣길에 자연스럽게 "친구 들와 함께"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사 먹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건 내 욕심이겠지. 사회성이 부족해서 치료를 받고 있고 또래와의 상호작용도 아직 많이 서투른데 그게 대체 가능하겠냐며, 너무 큰 꿈은 꾸지 말자고 나를 다독였다. 

가끔 아이 또래의 활달한 아이들 몇 명이 편의점 앞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면서 장난치고 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한없이 부러워했다.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누가 뒤쫓기라도 하는 듯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오는 내 아이에게 그런 편의점에서의 모임을 기대하는 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겨울방학 들어서 놀이터에서 자주 만나 노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 아이들은 운동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고 굉장히 외향적이기까지 한 핵인싸 느낌의 또래 학년생이다. 어쩌다 내 아이랑 한 두 번 놀기 시작했는데, 집에 오려면 꼭 놀이터를 지나쳐야 하는 아이를 보고도 전에는 투명인간 취급하더니 어느 순간 같이 놀자는 말을 해왔다.


아이는 같이 놀자는 말에 만사 제쳐두고 끼어들었고, 어설프게나마 같이 어울렸다. 아직 감정조절이 어렵고, 화용 언어도 서툴러서 상황을 제대로 이해 못 할 때도 있고 대근육이 느려 잡기 놀이할 때면 만년 술래만 하고 있다. 몇 번이나 나에게 달려와 친구들이 나만 술래 시킨다고 억울해하고 울기까지 했다. 나도 몇 번 그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아가면서 술래 좀 하면 안 되겠냐고 기분 상하지 않게 제안해주기도 했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아이도 그들의 분위기에 적응해 가는 듯했다. 최근에는 거의 매일 그 핵인싸 아이들과 만나서 한 시간씩은 놀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쫓아다니며 지켜보지는 못하지만 나름 큰 갈등 없이 노는 것 같은 눈치다. 


내 아이가 이 녀석들에게 공짜로 사회성 수업을 받고 있는 셈이다. 센터 안의 작은 교실 안에서 사회성 부족한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선생님의 지도로 받는 사회성 치료와는 격이 다른 사회성 수업 말이다. 진짜 또래 간의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선생님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놀이가 아닌 진짜 놀이가 일어나고, 진짜 또래들이 사용하는 온갖 규칙과 유튜브 유행어 따위가 오가는 소통의 장이 아니냔 말이다.



어제도 친구들에게 연락이 와서 한 시간 놀고 오기로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기에 전화를 해서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다는 대답이 왔다.



뭐라고?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다고?



나는 정말 놀랐다. 돈도 없을 텐데 어떻게 사 먹었냐니까 돈 있는 친구가 대신 계산해 줬단다. 10살짜리 아이들 네 명이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을 사 먹는 그 평범한 장면에 내 아이가 끼어있었다니. 

이거 너무 상상이 가지 않는 그림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어렴풋이 꿈꾸기만 했던 그런 장면을 이렇게 빨리 이루게 될 줄이야.



혼자 컵라면에 뜨거운 물 붓는 것도 못할 텐데, 수프 뜯어 넣는 것도 손가락 힘이 약해서 잘 못할 텐데 오만가지 걱정이 다 떠오른다. 집에 돌아온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 편의점에 가게 된 거냐고, 컵라면은 어떻게 만들었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뜨거운 물 붓는 거는 친구가 도와줬고 나머지는 자기가 스스로 했단다. 매운 음식은 통 못 먹기에 평소에도 진라면 순한 맛을 물에 한 번 헹궈줄 정도인데 친구들 따라서 무려 육개장을 먹었다고 했다. 그 매운 육개장을 물에 헹구지도 않고 먹었다고? 아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별로 안 매웠다고.



아직 가리는 음식이 많고 입 근육 발달도 더뎌서 다양한 맛과 질감을 맛보기 어려워하는 아이다. 보통 발달이 느린 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육개장을 그대로 친구들과 먹었다고 하니 나에게는 놀랠 노자였다.



요즘 아이들에게 편의점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문화를 소비하러 편의점에 가는 거예요.
많은 어머님들이 집밥, 삼시 세끼, 유기농에 집착해 편의점 음식이나 패스트푸드 등에 엄격합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치킨과 편의점 음식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사는 존재입니다.

또래와 소통하는 수단으로써 젤리를 사는 것이라면, 그건 아이가 단순히 군것질을 하는 게 아니라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거예요. 이런 아들의 문화를 부모님이 이해하고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ADHD 우리 아이 어떻게 키워야 할까, 신윤미교수>



신윤미 교수님이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편의점은 문화를 소비하러 가는 곳이다. 


나도 한때 발달이 느린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글루텐프리, 카제인프리 식단까지 시도한 사람이다. 아이의 건강에 컵라면은 독이 될 수 있는 음식인데 이거 이렇게 뿌듯해해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카제인 프리는 우유나 유제품을 식단에서 제외하는 건데 이건 그나마 어떻게든 실천이 가능했는데 글루텐프리는 정말 너무나 어려웠다. 

일반적인 공립학교를 보내며 급식을 먹이고 부족하나마 일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일상을 보내는 아이의 식단에서 밀가루를 아예 없앤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반적인 교육기관에 보내는 걸 포기하고 아예 홈스쿨링을 시킨다거나 시골에 데리고 가서 산다면 밥에 반찬만 먹이면서 살아볼 수도 있겠지만 과자, 빵, 케이크, 아이스크림, 라면 등을 아예 차단시키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외국처럼 셀리악병 환자가 많아서 글루텐프리 식단이 흔하다면 좀 더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삼시 세끼 엄마표 유기농 음식을 먹이는 것보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함께 먹는다는 게, 그들의 문화에 융화될 수 있다는 하나의 지표라서 나에게는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큰 이벤트라고 볼 수 있다. 


같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여전히 마음 아플 때도 많고 대화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지만 아이의 그런 이상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함께 놀아준 다는 건, 그래도 놀만하니까 같이 어울리는 게 아닐까. 


아직 대등한 관계처럼 보이진 않지만, 아이와 백 퍼센트 평등하고 대등하게 놀 수 있는 친구를 기다리다가는 영영 또래와 어울릴 기회는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럭저럭 친구들과 어울리며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먹었다는것은 아이가 훌쩍 성장했다는 또 다른 징표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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