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8년간 다섯 도시에 주소지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뭐? 이젠 또 프랑스로 간다고? 야, 우리 다정이 사주 한 번 구경하고 싶다, 응?"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자주 발길 하는 약국의 약사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의 모든 잔병치레를 보아오셨고, 뉴욕에서 유학할 때 상비약을 구비하도록 도와주셨고, 홍콩에서 살 때는 한국에 와서 영양제 등을 사면 꼭 바카스를 한 병 같이 주시던 분이다. 그러니 내 개인사와 국제 이주사를 나보다도 잘 꿰고 계시는 분이다. 애교와 장난기를 잔뜩 담아서 "그러게요 약사님, 저도 제 사주 정말 궁금해요. 사주 잘 보는 분 저도 알면 좀 알려주세요!" 했는데 "됐어, 으이구, 사주는 무슨, 니가 언제부터 사주 그런 걸 다 봤다고, 응? 여태껏 그랬던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어. 근데 너희 엄마가 너 참 보고 싶다 하겠다"하며 바카스를 또 한 병 내주셨다.
약사님의 말씀이 틀린 것 하나 없다. 사주라는 것이 진짜 있다면 약사님께서 말씀은 안 하셨지만 짐작하신 대로 내 사주엔 분명 역마살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없다고 하면 나는 사주를 믿지 못할 것 같다. 지난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나는 아시아의 한국에서, 미주의 뉴욕으로, 다시 아시아의 홍콩으로, 이제는 유럽의 프랑스로 국제 이사를 여러 번 했다. 이 중 딱 한 번만 내가 의도를 가득 담아 옮긴 것이었고, 나머지는 전혀 의도치 않았던 국제 이주였다. 그리고 엄마가 나 참 많이 보고 싶어 하신다. 나도 똑같고.
한 때는 내가 한국 국적이 아닌 배우자를 만나서 이렇게 고국을 떠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단정 짓기도 했다. 페르세포네가 하데스가 건넨 석류알 중 한 알을 먹었고, 그래서 그 대가로 일 년 중 일부는 자신이 자란 따스하고 햇살이 내리쬐는 지상과 자상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 지하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이 말이다. 배우자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우리 둘이 국적이 다르고, 배우자의 일이 한국에서 하기 힘들며, (아직까지는!) 내 수입이 배우자의 수입에 준하지 못해서 내가 타국 살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내가 그리도 사랑하는 고국을 떠난 것은 결혼하기도 전이었고, 심지어 나 자신의 공부를 위해 뉴욕으로 유학 길에 올랐을 때였다. 어찌 보면 사건의 발단은 내가 유치원을 가기도 이전의 유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미군이 하우 두 유 두, 하고 물어보면 아임 파인 땡큐라고 대답하면 돼. 그럼 초콜릿을 줄 때도 있어." 달콤함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이것만큼 외국어에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영어 한 마디를 가르쳐주시던 순간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파란색을 너무나 좋아해서 상하의 모두 파란색을 입지 않으면 유치원 등원을 거부하던 손녀를 할아버지께서는 무척이나 아끼셨다. 생일 선물로 노란색 실로폰을 안겨주시고는, 세상에서 가장 듬직한 손으로 매직펜을 드시고는 '다정 용'이라고 적어주셨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말이니 그 말이 한국어가 아닌지도 모르고, 미군이 뭔지도 모르지만 여러 번 되뇌며 외웠다. 하우 두 유 두. 아임 파인 땡큐. 그런 나를 보고 할아버지께서는 자랑스럽다는 듯 내게 미소 지어 주시고, 내 헝클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셨다. 할아버지도, 내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한 부모님도, 영어 선생님들도 내가 타지살이를 하길 바라며 영어를 가르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음,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다.
초콜릿이 좋아서 영어를 배우고, 해리 포터가 좋아서 영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고, 가장 잘하는 과목이 영어였기에 영어 공부에 더 매진하고, 대학교 1학년 때 영어는 이미 어느 정도 하니 불문과에 갈까 하여 수강한 불어 입문에서 처참한 학점을 받은 뒤, 하던 대로 잘하던 영어나 계속 하자며 영문학과에 진학해버리고, 학점을 자비로이 주신다는 교수님의 수업을 들었다가 영미 희곡에 빠져버리고. 나는 결국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좇다가 고국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 머리가 클 대로 컸는데도 어찌 한 치 앞은 내다보고 두 치 앞은 내다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유학길을 떠나던 시점에 나는 분명히 모든 일이 잘 풀리면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 이후에도 얼마간은 뉴욕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뉴욕에 머무는 것은 한국, 가족을 떠나 있는 것이다. 근데 그냥 '뉴욕에 머문다'는 지점까지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고국과 가족과 멀리 살아야 한다는 점까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면 당연히 고국을 떠나 있을 때의 아픔을 상상할 수 있는데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그 상상을 벅벅 지워버렸는지도.
페르세포네가 실존 인물이 아니었으니 그가 자의로 석류알을 한 알 먹게 되었는지 아니면 타의로 석류알을 하나 먹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물론 실존하는 여신이었어도 고대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내가 물어볼 길은 없겠지. 하지만 한낯 인간이 아닌 여신의 딸이었는데 과연 페르세포네가 타의로만 움직이고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드는 때도 있다. 어쩌면 그는 모든 걸 다 향유하고 싶어서 두 세계를 다 누릴 불완전한 방법을 찾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땅 위의 산들바람은 향기롭고, 어머니의 품은 따뜻하다. 하지만 대지 위에서 페르세포네는 '데메테르의 딸'이고 '소녀'에 불과했다. 지하 세계에서 그는 '성인'이 되었고 군주의 지위까지 누리게 되었다. 석류알을 하나 먹고 그는 두 세계를 다 누리게 되었다.
나는 페르세포네가 아니다. 나는 전능하지 않다. 내게는 영원이 없다. 나 역시 석류알을 하나 먹어버렸지만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결에 날아다니며 바람이 데려다주는 곳에 내려앉아 꽃 피워야만 한다. 바람은 나를 지난 8년간 서울, 뉴욕, 홍콩, 프랑스의 퓌토,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파리 근교의 다른 도시까지 총 다섯 도시에서 휘날리게 했다. 국제 이주에도 마일리지가 있다면 내 나이대에 나보다 높은 등급의 회원이 흔치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일까?
사랑하는 나의 고향 서울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온 힘을 다해서 자주 가려고 한다. 하지만 시간과 자원이 유한한 이 인간이 다시 찾기가 쉽지 않은 곳들이 있다. 작별할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았는데 이별해야만 했던 이도 있다. 내가 얼마나 애정 했는지 떠나고서야 깨닫게 된 장소와 이들도 있다. 페르세포네는 매일 향수하지 못해도 지하 세계의 귀한 원석들, 지상 세계의 들꽃과 과실을 모두 골고루 추억하며 살 테다. 나에게도 매일, 언제나 만나지 못하더라도 항상 추억하는 이들이 있다.
여태껏 말로, 글로 풀어본 적이 없는 이 마음을 담아, 이제라도 연서를 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