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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00한 제주발령기

by 핸준

나는 녹내장을 앓고 있다.


안압이 올라가면서 시신경을 손상시키는 이 병은 완치라는 개념이 없다. 매일매일 꾸준히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생활습관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건강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때때로 녹내장은 인생에 있어 큰 걸림돌처럼, 불운한 질병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질병은 술 담배를 하지 않고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제성을 내게 부여하면서, 오히려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


아예 아프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손상된 시신경은 되살릴 수가 없다. 처방받은 안약을 제시간에 맞춰서 잘 넣고, 하지 말라는 것 하지 않고 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 질병 앞에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처한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운명을 탓할 것인지, 오히려 건강관리의 기회가 됐다고 긍정적으로 여기고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갈 것인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두 번째 회사에 입사한 직후 제주도로 발령받았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이런저런 어려움들로 인해 스스로를 '운이 없는 사람'이라 칭하며 자기 연민에 깊게 빠져있었다. 누군가 내 근황을 물어볼 때,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인양 떠들어댔다. 앞선 글들 가운데 그런 마음들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브런치북의 첫 글에, 고등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기억의 미화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지나고 나면 아름답고 좋은 추억들만 남는 것, 사람이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직원 합숙소에 입주했을 때처럼 방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모든 짐을 비운 나는, 침대커버까지 육지로 올려보내 까끌한 매트리스 위에 앉아서 지난 2년을 잠시동안 돌아봤다.


힘든 날들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힘든 날들 가운데 내가 이겨내지 못한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다.


힘겹게 넘었던 제주도의 수많은 오름들은 내 다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넘실거리는 파도에도 굳건히 지키고 서있던 발 밑은 더욱 단단해졌을 것이다.




서울의 본부부서로 자리를 옮긴 지금은, 그 파도와 오름들이 앞으로의 내 직장생활에 얼마나 큰 양분이 됐는지 조금씩 체감하고 있다. 단순히 그땐 고생했으니까 쾌적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지금이 좋다기 보단, 고생하면서 몸으로 배운 여러 가지 것들이 남들은 가지지 못한 큰 자산이 되었음을 느낀다. 제주도에서 2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는 사람이(그것도 100% 타의로) 몇이나 있겠는가?


제주생활의 마무리가 다가올 때 나는 사무실 직원분들께 손편지를 하나씩 써드렸다. 블로그에도 브런치에도 글을 쓸 때마다 느끼지만, 이만큼 큰 마음을 손바닥만 한 종이에 담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편지 쓰기가 생각보다 오래 걸린 탓에 졸음을 참아가며 삐뚤빼뚤 써 내려간 종이에는 감사가 가득했다.


덕분에 힘든 시간 잘 이겨냈습니다,

당신을 첫 사수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저의 제주 생활의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아들처럼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에서도 잘하겠습니다,

저는 운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젠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졸음을 참아가면서 썼던 다섯 통의 편지를 통해, 나는 내 마음을 비춰볼 수 있었다. 나는 지난 2년의 제주생활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아래는 꽤나 지쳤던 어느 날 블로그에 썼던 넋두리다.


월화수목금토일
월화수목금토

연속 13일 근무

주말근무는 당직비 7만 원

도매상인지 중앙회인지 알 수 없는
끔찍하고도 놀라운 갑을관계

알코올중독자 사무소장

고발하니 돌아오는 손가락질

어떻게든 버텨내는 하루들
어떻게든 해내는 일들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거지 같은 성질머리

내년엔 더한 고생길이 다가옴을 암시하는
본부의 방침

너무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다잡는
출근길 마음가짐



그리고 아래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썼던 글의 일부다.


당장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그 시간에는
어푸어푸 숨 들여마시기 바빠서

이걸 내 역사에 기록할지 말지,
또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지
고민할 시간과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수영하는 게 익숙해지든
아니면 물 밖으로 나오든 배를 타든

'나중'이라고 부르는 언젠가에는
그 시간을 해석하고 기록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읽은 책의 관점을 빌리자면,
과거의 사실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 강조되는 것은 그것을 기록하는
현재의 역사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할지
끊임없는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11개의 글로 기록해 본 나의 첫 브런치북은 긴긴 시간이 지난 그 언제라도 나를 역사가로 만들어줄 것이다.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나의 00한 제주발령기'의 빈칸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만들어낸 다채로운 수식어가 자리할 것이다.


지치고 힘든 순간을 마주해서 이 글을 꺼내볼 역사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온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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