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공용어인 영어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영국식, 미국식, 인도식 등등.. 분명 같은 말이지만 사용자들의 억양과 문화를 반영하며 조금씩 다른 모양새를 갖는다.
나는 대학생 시절 유럽을 여행하며 스코틀랜드에도 며칠간 머물렀는데, 하루는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아시안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뷔페식이어서 그랬는지 익숙한 요리들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근처 테이블에서 호탕하게 웃으며 쩌렁쩌렁 대화를 나누던 네 명의 스코틀랜드 아저씨들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나는 영어를 아주 잘하진 못해도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외국인들과 이런저런 대화는 가능한 수준이었는데, 그 아저씨들은 도대체 무슨 언어로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영어'를 구사했다. 전 세계를 놓고 보면 조그맣게 느껴지는 이 한반도에도 이런저런 사투리가 있으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영어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우리 직원합숙소의 구성원들만 봐도, 경기도에서 온 나는 표준어를, 울산에서 온 *철이형은 경상도 사투리를, 광주에서 온 *진이형은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본인들은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억양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영화 [황산벌]을 보면, 백제군들의 작전 내용을 엿들은 신라군이 '거시기'라는 말에 대해서 해석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시기를 거시기해서 거시기해불라는 말을, 신라의 암호해독 전문가는 머리를 싸매도 알 수가 없다.
소백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생긴 언어장벽이 그 정도라면,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제주도는 오죽할까? 거시기라는 말의 뜻을 알기 위해 이리저리 고군분투하는 신라의 암호해독가와 같이, 나는 매일같이 제주도민들의 말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제주도에서 근무한다고 너무 유난 떠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맞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대체로 제주 토박이들이 사용하는 어휘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저 조금 특이하고 흥미로운, 하나의 재미요소로 느낄 정도이다. 나와 같이 발령받은 형들도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한 상황은 '대체로'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출근 이틀차에, 사수는 나에게 한 가지 양해를 구했다.
'이제 표준어 안 써도 괜찮을까요?'
내가 듣기 편하도록 표준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신경을 많이 쓰고 계셨던 것 같다. 편하게 말씀하시라는 나의 대답에, 그는 마치 물속에 있다가 올라와서 파아- 하고 숨을 들이쉬듯 개운해 보였다.
제주도 사투리는, 하나의 소수 언어로 보는 견해도 있어 '제주어'라고 한다. 나는 처음에 이걸 정말 웃긴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충청도 사투리를 충청어, 강원도 사투리를 강원어 따위로 표현하지는 않지 않는가? 하지만 며칠 지내보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 말은 사투리 수준이 아니었다.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도, 나에게 하루에 수십 번씩 전화를 거는 거래처들도 '찐 로컬' 제주도민들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도민 중에서도 스코틀랜드에서 봤던 아저씨들과 비슷한 연배라서, 나는 말을 알아듣는 것 자체에 어려움을 느꼈다.
가령
골아줍서, 데껴불라, 강봥와, 잘도 요망지다, 내가 하클, 무사 겅햄샤.
이 말들이 무슨 뜻인지 유추가 가능한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나 [웰컴투 삼달리]를 열심히 봤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제주 출신 대학동기가 알려준 '밥 먹언?'이나 '뭐하맨?' 정도밖에 몰랐기 때문에 필사(必死)의 노력으로 제주도 말을 분석해 나갔다. 오래된 사무실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쩔쩔매며, 정말 죄송한데 제가 육지에서 와서 하신 말씀을 잘 못 알아들었다고,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시라고 하면서 말이다.
갑의 위치에 있는 거래 상대방들은 한숨을 푹푹 쉬며 굉장히 답답해했다. 어디 아무것도 모르는 육지것이 와서 짜증 나게 한다는 말도 들었다. 나라고 모르고 싶겠는가. 제일 답답하고 힘들었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
상황과 맥락을 읽고, 대충 때려 맞히면서 반복되는 어미의 패턴을 파악했다. 아예 유추가 불가능한 단어들은 사무실 직원들에게 하나씩 물어가며 외웠다. 어떤 식으로 쓰는 건지 나름의 예문을 가지고 조합해 나갔다. 그렇게 발령 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 나는 제주어의 시제표현을 문법처럼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그 당시 파악한 시제표현은 세 가지였다. : 미래형, 현재진행형, 과거형
각각에 대응하는 어미의 자음들이 있었고, 이를 활용함으로써 다양한 용례를 만들 수 있었다.
'자자 형님들, 제가 가만 보니까 제주도 말에 이런 규칙이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맞는지 들어봐 주세요.'
자음 'ㅋ'은 미래의 의미를 가진다.
하클(할게), 하쿠과?(할 것입니까?), 하크메(할테니까)
자음 'ㅁ'과 'ㅇ'은 진행의 의미를 가진다.
하멍(하면서), 하맨(하는중이야), 행(해서/하고), 행이네(해가지고), 햄서(하고있어)
자음 'ㄴ'은 과거의 의미를 가진다.
핸(했다), 완(왔다), 알안(알았다)
이걸 듣고 있던 직원들은 난리가 났다. 잠시 생각하다가 '오오!! 맞다 맞아! 어 진짜 그렇네!' 하며 신기해했다.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던 모국어의 문법을 처음 마주한 누구라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때 우리 직원들은 나의 추론에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아직도 다른 사람들에게 '얘가 얼마나 똑똑한 애인지'를 설명할 때 단골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패턴화 하기 어려운, 단어 자체가 표준어와 다른 어휘들은 생활하면서 하나씩 알아갔다. 중세국어가 많이 남아있고 나름의 규칙성을 가진 어휘들의 변형 패턴이 있어 알아가는 과정이 꽤나 재미있었다.
축구선수 이강인은 스페인어로 꿈을 꾼다고 하던가? 제주에 온 지 1년이 지난 어느 순간부터는 가끔 제주도 말로 생각하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제주의 억양이나 단어를 써놓고는, 이걸 표준어로 뭐라고 했었는지 고민할 때도 있었다. 고향 친구들이 말투가 왜 그렇냐고 물을 때, 나의 표준어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제주라는 공간적•사회적인 집단에 녹아들고자, 이곳에서 적응하고 생존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을 못 알아들어서 두 번 세 번 되묻고, 답답하다고 욕을 얻어먹어 복잡해진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랐던 나를, 지금은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제주어는 나의 제2외국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