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세 가지
: 의, 식, 주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청하던 나는, 어린 시절 한자를 배우며 알게 되었던 저 세 글자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구하기 쉬운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식-의-주 순서가 아닐까? 밥도 매일 먹고 입을 옷도 있지만, 내 몸 하나 누일 집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직원 합숙소 계약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기간 동안의 숙소비는 사비로 충당해야 했기에 우리는 무조건 싼 숙소를 찾았다.
내가 오고 싶어서 왔나?
조금은 억울했지만, 그래. 지방에 연고가 있는 사람이 서울로 발령받았다고 해서 집을 구할 때까지의 숙소비를 지원해주진 않으니, 나를 포함해 제주로 발령받은 우리 세 명에게 합숙소를 지원해 주겠다는 것은 꽤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역차별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1박에 2만 원쯤 했던가? 숙소는 적당히 깔끔했고 어지간히 불편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비좁은 공간에서 같이 밤을 보내며 자는 둥 마는 둥, 잠을 계속해서 깨는 통에 회사에 출근해 있는 동안에는 꾸벅꾸벅 쏟아지는 졸음을 필사적으로 참기 일쑤였다.
이튿날부터 근처 편의점에서 귀마개를 사 와서 끼고 자니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깊은 잠은 잘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숙소에서는 사장님이 아침을 차려주시는 게 참 좋았다.
정말 감사하게도, 사무실이 멀어 일찍 출발해야 했던 나를 위해 기존 조식시간 보다 한 시간 먼저 준비를 해주셨다.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 같아 송구스러워하는 내게 사장님은 손님이 내 자식 뻘인데 멀리까지 와서 너무 고생 많다며, 아침이라도 챙겨줄 테니 꼭 먹고 가라고 하셨다.
썰렁한 지하에 켜놓은 난로
커피 포트로 끓여놓은 메밀차
갓 구운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의 온기
사장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아침을 먹는 그 시간만큼은 전날 사무실에서 느낀 충격과 지난밤의 시끄러운 소음들을 모두 잊을 만큼 너무나도 평온했다.
역시 음식은 따뜻해야 한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고 게스트하우스 생활이 익숙해질 때 즈음, 고대하던 합숙소가 생겼다.
입주하는 날은 눈이 펑펑 많이도 왔는데, 폭설 때문에 차들이 이동하질 못해서 퇴근하는데만 세 시간쯤 걸렸다. 캐리어와 각종 박스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간 합숙소에는
아직 집기도 가구도 부족했지만, 우리가 맘 편히 쉬고, 먹고, 드러누울 수 있는 '집'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이 감격스러웠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출퇴근하는 일은 내 평생에 다신 없을 것이라고, 만약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돈을 더 주고서라도 좋은 숙소에 묵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직원 합숙소의 방은 셋, 사람도 셋.
우리는 일단 방 배정부터 했다. 개인 화장실과 에어컨이 설치된 안방과 중간 방, 가장 작은 방이 있었고 우린 모두 안방이 걸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다리를 타내려 갔다.
이런 이런, 제주 발령자들 중 가장 먼 사무소에 배치된 나는 방도 가장 작은 것을 얻었다. 정말이지 지독한 팔자다. 그래도 청소하기는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바닥에 누워있으니 배가 슬슬 고파졌다. 이런 날은 역시 치킨 피자를 먹어야 한다는 형들의 말을 따라 배달 주문을 하려고 했으나, 폭설로 인해 도로는 마비돼 있었다.
우리는 다 같이 두터운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포장 픽업을 다녀왔다. 겉옷 위로 쌓이는 눈들이 곧 우리를 눈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밖은 아주아주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그래도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왜인지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조금 지저분하고 처량해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이때 사진을 찍으면서 정말 기뻤다. 집에서 뜨뜻하게 보일러를 켜놓고
식사를 하는 이 평범한 일상이, 비록 크진 않지만 '내 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큰 안정감을 주는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내 집 마련에 목숨을 거는구나 싶었다.
다이소에 다녀오고, 집 앞 가구점에서 식탁과 의자를 사 오고, 이런저런 집기들을 채워 넣으니 합숙소는 제법 집 같은 모양새를 갖춰 나갔다.
퇴근하고 형들이랑 거실 테이블에 모여 앉아 저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을 나누면서,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바다 건너 타지에서의 힘든 마음들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
적어도 제주에서만큼은 이곳이 '우리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