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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번 버스를 타고

by 핸준

제주공항에는 'HELLO JEJU'라는 말이 써진 포토존이 있다. 김포발 비행기를 함께 타고 온 관광객들은 그 앞에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의 인스타그램에 '23 JEJU'라는 제목으로 하이라이트를 만든다면 아마 그 사진이 첫 스토리로 올라갈 것이다. 며칠 간의 짧은 여행에도 그러할진대, 2년 동안의 발령에는 어떨까?


나 또한 공항에 발을 디딘 그 순간이 나름의 기념비적인 장면이라 생각했다. 군대로 치면 훈련소 입소하는 날 정도 되려나. 마침 기간도 비슷하다. 나는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한 달 살기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SNS에 기록을 남겼다.



다음 날 제주지역본부에서 임용식이 진행됐다. 정장을 차려입은 채 꽃다발과 임용장을 받았고, 처음 보는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총무를 맡고 있는 김 과장님의 손에 이끌려 4층 건물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인사를 다니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신규직원 000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빠는 명절이나 제사처럼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 갈 때마다, 주차를 마치고 뒷좌석에 앉은 나와 동생을 향해 몸을 돌리고서는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어른들께 인사 크게 해야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들으니 지겨울 지경이었다. 어린 우리는 알겠으니까 그만 이야기하라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가 그렇게 여러 번을 반복해서 주지 시키고 가르친 것은, '인사'라는 짧은 순간의 영향력이 백 번을 말해도 부족할 정도로 크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에 더하여, 그동안의 삶에서 자연스레 터득한 인사의 중요성을 곱씹으며 큼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다녔지만, 크고 깔끔한 그 건물에 나와 함께 일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제주지역본부에 배치된 형들과 달리, 나는 저 멀리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외딴 사무소로 배치되었다.


원래는 임용식에 내가 모실 센터장님도 참석하기로 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임용식이 끝나고 인사를 마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총무인 김 과장님은 그에게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에 실패했고, 이 소식을 들은 책임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그냥 행사를 시작해 버렸다. 나는 웃고 있는 얼굴 뒤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왜 그럴 줄 알았다는 거지? 다들 왜 넘어가는 거지?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근태에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불안해졌다. 그리고 빨갛고 당당한 얼굴로 등장한 그를 보고, 함께 있던 김 과장님은 나지막이 한 마디를 뱉었다.


"아이고, 또 한 잔 하셨네.."


오전 10시경, 그는 딸꾹질을 하고 몸을 비틀거릴 정도로 술에 잔뜩 취해있었다.




"너구나? 그래. 가자"


깔끔하고, 젊고, 젠틀한 김 과장님의 손에서 수더분하고, 짙은 향수냄새 뒤로 알코올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그의 손으로 인계되는 내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던 탓일까? 김 과장님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따뜻한 눈으로 나를 위로하는 듯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이 사람이 이곳 제주에서 어떤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지, 앞으로 펼쳐질 내 미래는 어떨지, 아까 임용식을 시작하며 가졌던 의문에 퍼즐을 맞추듯 탁- 하고 깨달았다.


그는 정말 웃겼다.


지역본부 건물을 빠져나가 택시를 잡더니 동광으로 가달라고 했다. (동광은 서귀포시 안덕면의 한 지명이다.) 택시기사가 동광 어디로 가냐고 하니 동광.. 오거리? 육거린가?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헷갈려했다. 기사는 동광 오거리를 내비게이션에 검색해 보겠다고 했고, 별안간 그는 화를 버럭 내며 "동광에 오거리가 어디 있습니까! 육거리지!"라고 소리쳤다.


기사는 본인이 제주 토박이가 아니라서 잘 몰랐다며 민망한 듯 사과했는데, 그는 '제주도 사람'이 아닌 기사에게 핸들을 맡기고 싶지 않았던 건지 대뜸 목적지를 인근의 버스 터미널로 바꿨다. 3분쯤 달렸을까? 우리는 제주시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에는 내가 싫어하는 비둘기가 잔뜩 있었다. 과자를 부숴서 먹이로 주는 후줄근한 노인도 있었다. 무언가 불만인 듯 성난 걸음걸이를 하며 택시에서 내린 그는 비둘기 무리를 개의치 않고 헤쳐나가더니, 벽에 걸려있는 버스 노선표를 유심히 읽어나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물었고,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짝다리를 짚고 서서 벌건 얼굴로 노선표를 노려볼 뿐이었다.


나는 그와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 차가운 의자의 냉기가 다리로 전해졌기 때문인지, 내가 모셔야 할 상사가 저런 모습이라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지 몸이 조금 떨려왔다. 마침 전화가 울렸다. 인사팀 과장이다.


계장님 안녕하세요~ 근무지에는 잘 도착하셨나요?

너무 신경이 많이 쓰여서 전화드렸어요.

어려운 것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시고..

잘 적응해 주시길 바라요.


치가 떨렸다. 당신은 여기가, 이 사람이 이런 줄 알면서도 나를 보낸 거냐고, 정말 너무한 것 아니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글을 쓰는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얘기했어야 했다.




그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버스를 찾았나 보다. 손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먼저 휙 올라타버렸다. 정장을 차려입고 꽃다발과 임용장을 든 나는, 그렇게 151번 버스에 탑승했다.


151번 버스는 제주시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공항을 거쳐 서귀포시 대정읍으로 향하는 버스였다. 그는 우리가 몇 분 정도를 갈 것이며, 어느 정류장에서 내릴 것인지 등, 그 어떠한 정보도 내게 말해주지 않고 잠들어버렸다. 나는 버스의 노선도와 발령받은 사무소의 위치를 검색해서 적어도 50분 정도는 버스를 타고 가야겠구나, 하고 판단했다.


뻣뻣하게 굳어가는 어깨가 불편해 정장 겉옷을 벗고 의자를 조금 뒤로 뉘었다.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숙면에 빠진 그를 한 번 바라보고, 내 옆자리에 가지런히 놓인 꽃다발을 한 번 바라보고, 창밖으로 비치는 공항을 이어서 바라보니, 당장이라도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캐리어를 들고 공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푹- 쉬고, 잠깐 눈을 붙였다.


언제 어디서 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아까 그가 택시에서 말했던 '동광 육거리'라는 곳을 검색해보기도 하고, 버스 노선도와 실시간 GPS를 번갈아 보며 얼마나 왔는가 확인하다가 졸기를 반복했다.


수차례의 졸음 끝에 그는 나를 정신없이 깨우고 먼저 일어나서 내렸다. 나는 벗어놓은 겉옷이며 꽃다발이며 짐을 급하게 챙기고 따라 내렸는데, 첫인사를 나누고 1시간여 만에 나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너는 센터장이 옆에 있는데 잠을 자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죄송하다고 했다. 그래야 다른 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때 정류장으로 SUV 한 대가 다가왔다. 내 제주생활의 버팀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수 이 계장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반가워요.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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