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세대보다 취업, 결혼, 출산과 같은 인생 사이클이 4년 늦어졌다고 말하는 어느 기사에서 2023년의 첫 취업 연령이 31세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내 주변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직장이나 대학교처럼 일종의 선별을 거친 준거집단에서 벗어나보니, 아주 터무니없는 숫자는 아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감사하게도 대학 졸업을 앞둔 스물다섯 살에 첫 직장에 입사했다. 연봉은 조금 아쉬웠지만 안정성이 보장되어 있었고, 집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을 만큼 가까웠고, 어른들이 잘 아는 회사라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직장에서 1년 만에 이직했다.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여러 번의 고배를 마신 취준의 끝에 맺은 소중한 결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세 번의 취업 기회가 있었다. 이 기회라고 하는 것은 대학에서 제공하는 취업연계 프로그램의 일종인 '실습'이다. 방학 기간 동안 회사로 실습을 나가 직원들이나 인사권자에게 잘 어필하면 취업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세 번의 기회 중 하나는 인사권자의 정치적인 이유로, 하나는 군 면제를 이유로, 마지막 하나는 군 면제를 받은 원인인 '건강 상의 문제'를 이유로 놓쳐버렸다. 사실상 뒤의 두 가지는 같은 이유라고 볼 수 있는데, 인사권자에게 정치적인 이유라는 게 뭐가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협동조합'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조직이 있다. 농협 축협 수협 산림조합이 대표적이다. 이 조직들은 조합원을 기반으로 하며, 조합을 이끌어갈 조합장을 투표로 선출한다. 그 잘난 미국 대통령도 3선 이상은 재임할 수 없다고 하지만 조합장은 당선만 되면 몇 번이고 몇 년이고 해 나갈 수 있다. 조합원의 표를 얻는 것이 그들에겐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과 친인척 중, 나의 첫 실습지 조합원은 없었다.
두 번째 실습을 나갔다. 조합원 아닌 게 대수냐. 꼭 나를 뽑도록 만들겠다는 의지로 무더운 여름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주차장을 쓸었다. 창고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모습에 반한 직원들은 나를 꼭 뽑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해병대 장교 출신의 조합장은 내가 병역의무를 '면제' 받았다는 사실이 크게 거슬렸는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군대 다녀오지 않은 사람에겐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꽉 막혔을 줄이야. 취업 잘 된다고 해서 이 학교로 왔건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적당한 인서울 대학으로나 갈걸.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상황에 엄한 후회에 빠져있기도 했다.
성실한 태도, 우수한 성적, 착실히 따놓은 자격증들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이 안타까운 상황에 나의 지도교수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조합에 나를 추천했다. 다른 학생들이 알면 난리가 날 수 있으니, 주변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말고 조용히 면접에 다녀오라고 할 정도로 임팩트가 큰 곳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면접에 들어갔지만 교수의 추천 덕분인지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자기소개서의 한 줄 한 줄 덕분인지 대화는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드디어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났구나! 역시 전국적으로 좋다고 소문난 곳은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다. 면접관이 병역 란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면제받으셨네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직은 말이다. 나에겐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사람이 면제받을만한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드러나지 않는 병이 속에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무 말 안 하면 모르는 이 병을, 물음표를 띄워대고 있는 인사 담당자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미묘해지는 그의 표정에서 이번에도 또 발목을 잡혔다는 것을 직감한 나는 휴대전화 너머 큼큼 목을 가다듬는 교수의 기침소리만으로도 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결국 취업할 곳을 찾지 못하던 나에게 손을 내민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병역이니 뭐니 따지지 않고 내가 가진 생각들과 능력만으로 나를 평가해 줬다는 사실이 참 감사했다. 입사 후 그동안 맺힌 한을 풀어내듯 최선을 다해 일하다 보니 핵심부서에 배치받고 임원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 어느 순간 '우리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우수한 인재!'가 되어버린 나를 향해 호기심과 의심, 질투와 시기의 눈들도 생겨났지만, 응원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이렇게 잘 적응했는데, 왜 이직을 결심했는가?
어느 회식날 타 부서 과장은 내게 술을 강권했다. 몇 번이고 내 발목을 잡은 그 '면제의 사유' 때문에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그 과장은 내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비를 걸고 싶었던 것인지 매우 고압적인 태도로 다가왔다. 몇 번을 거절하니 그는 나를 식당 밖으로 불러내서는
일을 잘하면 뭐 하냐 술을 안 마시는데
너 같은 놈은 필요 없다.
꼽냐? 꼬우면 그만두든가 술을 먹든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어쩌겠냐
와 같은 비이성적이고도 모욕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우리 팀 사람들이 한참을 말리고 진정시켜서 겨우 마무리가 된 그 길바닥에서, 나는 절이 싫은 중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굳이 문제 삼고 싶지도 않았고, 문제 삼는다 해도 회사가 그에게 징계를 내릴 가능성도 매우 적었으며, 그가 마음을 바꾸어 나에게 사과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리니 속에서 울긋불긋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날도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몇 번이고 이겨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천천히 걸으며 밤공기에 열을 삭인 기억이 선명하다. 모욕감을 걷어내니 나에겐 이직의 욕구만이 남아있었다.
휴일에 열심히 작성한 자기소개서로 서류전형에 합격하고, 퇴근 후 틈틈이 공부한 필기시험에도 합격, 제사가 있다며(우리 집은 기독교인데 말이다.) 조금은 수상한 화요일 휴가를 얻어 다녀온 면접의 다음 날. 이 정도면 붙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함께 지금 나가지 않으면 평생 여기서 머무를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어우러져 퇴사를 선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롭게 갈았던 마음과 집중력이 뭉툭해지고, 안주하는 마음이 커져가고 있음을 느껴 합격 발표가 나기도 전에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사수, 과장님, 팀장님, 부장님, 이사님, 조합장님을 한 분씩 설득해 가면서 올라가는 시간이 딱 한 달 걸렸다. '도대체 네가 왜'라는 질문에 술을 강권한 그 과장의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은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 마지막 인사 때 악수를 얼마나 세게 하던지. 사춘기 때 친구들과 팔씨름을 하며 잔뜩 손아귀에 힘을 주듯 했다.
최종합격 발표 날, 팀장님은 아침부터 결과가 언제 나오는지 수시로 물었고 (아마 떨어졌다고 하면 한 번 더 설득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지금보다 더 크고 좋은 회사에 합격한 아들뻘 부하직원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맡은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고 떠난 나는 금요일에 퇴사, 주말 이틀을 쉬고 월요일에 새 회사에 입사했다.
흐리고 춥던 12월 중순의 어느 날, 꼬박 일 년을 일한 첫 직장을 뒤로하고 새로운 회사에 발을 들였다. 신문에서 종종 보던 본사 건물 앞에는 목도리 위로 입김을 불어내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입은 대부분 본사로 배치된다던데, 나는 앞으로 지겹게 볼 건물을 굳이 찍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임용장 교부식이 진행되기 전, 인사팀 직원은 입사자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무언가를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어렸을 때 봤던 두부장수가 종을 울리며 골목을 누비던 모습이 그에게 겹쳐 보였다. 여유로운 듯 하지만 물건을 팔아야 하는 초조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 모습. 드디어 내 앞에 선 그는 나와 주변의 몇몇 직원들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혹시 제주도 가고 싶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