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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출근길

by 핸준

조금 쌀쌀한 아침, 합숙소 창문으로 보이는 한라산이 맑은 햇빛을 받으며 우뚝 서있었다. ​씻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 전 사진을 하나 찍어보았다.

50km 정도 떨어진 사무실까지 출근은 어떻게 하느냐.

우리 사무실 근처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네 대가 있었는데, 오래 걸리기도 하고 시간도 조금 애매했다. ​다행히도 사무소장의 출퇴근과 직원 출장용으로 사무소에 배치된 차가 있어 이걸 타고 직원들이 카풀을 했다.

옵션이 하나도 없는 깡통 차량이라 오토홀드나 크루즈 컨트롤 같은 주행보조 기능이 없었고, ​이런 차를 매일 왕복 100km를 운전해서 그런지 오른쪽 발목이 조금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 운전습관에 문제가 있던 걸 지도 모르겠다.


가장 멀리 살고 있는 나는 제주시내를 돌며 카풀을 시작했다. 첫 번째로 제주시 버스터미널 맞은편에서 센터장님을, 제주시 오일장 인근 서중학교 앞에서 물류 직원을, 노형초등학교 근처에서 사수를 만나야 했다.




접선 포인트에서 잠깐 비상등을 켜고 있으면, 사이드미러로 어딘가 절룩거리는듯한 그의 모습이 비쳤다. 차 문이 열림과 동시에 ​훅- 술 냄새가 풍겨왔다.

그는 집에서 아내의 감시를 피해 새벽 3~4시경 몰래 집 밖으로 나가 편의점에서 술을 사 들어온다고 했다. 들어오는 길에 반 병을 꿀꺽, ​남은 반 병은 집 앞 돌담에 숨겨뒀다가

출근하는 길에 나오면서 꿀꺽했다. ​가끔 품 안에 고이 챙겨 와서 출근길 차 안에서 마시기도 했다.

보통 안주 없이 깡소주를 마셨고, 안주라고 해봤자 저런 아이스크림이었다. 이런 사람은 살면서 처음 봤다.

애초에 새벽에 몰래 술 사러 나가고, 그걸 집 근처에 숨겨놓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중학생 때 친구들이 부모님의 눈을 피해 아파트 소화전에 담배를 숨겨놓던 광경과 퍽 비슷했다.


담배 하니까 또 생각나는 게 있는데, ​그렇게 차를 타고 가다 보면 그는 갑자기 뒷자리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곤 했다.

한 개비를 태울 때 나는 말없이 창문을 내렸고, 두 개비째엔 이따 내려서 피우시면 안 되냐 물어봤고, 세 개비째 불을 붙이길래 화를 낸 적이 있다. ​


적당히 좀 하시라고 아버지뻘 책임자에게 성을 내봐도,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게진 사람한테 무슨 소용이 있었겠냐만은.. ​아마 기억도 못할 것이다.




출근길에 우리는 라디오를 켜고 갔는데, 그는 TBN 제주교통방송에서 하는 '출발 제주대행진'을 정말 좋아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요보록 소보록이라고, 제주어로 콩트를 하는 코너가 있었다. 난 이걸 듣고 있노라면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았다.

중년의 남자 여자 한 쌍이 제주어를 지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쨍쨍한 억양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나에게, ​그는 지금 이 사람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일지 맞혀보라면서 자꾸만 퀴즈를 냈다.

영어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출근길에 항상 제주어 공부를 했다. ​정말 라디오를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그 덕에 정말 빨리 배우긴 했다. 귀가 트인다는 말이 딱 맞았다. 몇 주 지나지 않아 다 이해하고 웃으면서 들을 수 았었다. 공익적 요소와 개그를 적당히 버무려서, 매일 아침 하는 것치곤 꽤나 퀄리티가 있는 대본이었다.




이렇게 가다 보면 편의점이 중간중간 있는데, ​그는 목마른 낙타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기름 떨어진 차가 주유소를 발견한 듯, 눈이 뒤집혀서 차 창문을 두드리곤 했다.

차 세우라!! 세우라!!

무시하고 지나치면 궁시렁궁시렁 대기도, 성을 내기도, 그냥 포기하고 입맛을 쩝 다시기도 했다. ​내가 그런 스트레스를 감당해 가면서 술을 사지 못하게 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그가 아침부터 술에 취하면 결국은 내가 고생이었으니 조금이라도 알코올을 빼보려고 했고

2. 그의 아내가 나에게 회사에 있는 동안의 감시와 컨트롤을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보는 바와 같이..

그녀는 감시의 빈틈을 없애기 위해 퇴근길 출발시간에 집착했다.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탁 낚아채고 싶어 했다.

내가 저런 문자에 답장을 하고 있으면, 옆에 앉은 그는 본인 아내한테 연락하는 거 아니냐며 핸드폰 내놓으라고 윽박을 질렀다.

처음엔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노력했는데 까마득한 고참, 직속 상사의 고집을 어떻게 꺾을 수가 있겠는가? 편의점에 차를 세워준 적이 몇 번 있었다.​ 방관했다는 측면에서, 나도 같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날이면 그는 흡족하게 알코올을 충전하고 귀가했고, 그의 아내는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술 사도록 내버려 뒀냐, 그러면 안 된다, 못 먹게 막아달라 말하며 뭐라 뭐라 쏘아붙이기도 했다. ​그래. 그가 술에 취해있는 것은 다 내 잘못이다.


잠깐 얘기가 딴 길로 샜는데, 아무튼 그렇게 합숙소에서 제주시내를 돌고 한 시간 정도를 달리면, ​인근 돈사에서 풍겨오는 축분냄새가 일품인 사무실에 '드디어' 도착하고, 긴긴 하루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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