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by 생각의 변화

리포트


봄 리그가 끝나갈 무렵 우주의 4학년과 누리의 2학년도 끝나가고 있었다. 태풍 샌디로 인한 휴교로 시작된 두 아이의 학교생활이 어느새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6월 마지막 주가 되면 길고 긴 여름 방학이 시작된다. 교인들 말로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하다 하다 집에 있는 것이 너무 지겨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때가 되면 개학을 하게 된다고 했다. 6월 마지막 주부터 9월 첫 주까지 거의 10주 동안이니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우주는 야구팀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우주의 원래 담임선생님은 루쏘라는 이름의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출산을 하게 되면서 남자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롤로 선생님. 나는 지금도 롤로라는 이름의 철자가, 정확한 건 모르지만, ‘Lollo’일 거라 생각하곤 한다. Laugh Out Loudly(LOL), 그리고 Laugh Out(LO), 크게 웃고 또 웃고.

우주가 묘사하는 롤로 선생님은 이름만큼이나 유쾌한 사람이었다. 롤로 선생님이 반을 맡으면서 우주는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롤로 선생님이 오기 전에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롤로 선생님으로 바뀌면서 롤로 선생님이 이런 일을 했고, 저런 말을 했고, 이런 쿠폰을 만들었고, 저런 숙제를 내줬고, 자신한테 이러저러한 걸 잘한다는 칭찬을 해줬다는 이야기를 재잘재잘 얘기하곤 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일이었는데, 학기 중에 언젠가 우주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했다. 아내와 나는 괜히 걱정이 됐다.

혹시 우주가 학교에서 무시를 당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할 생각을 한 걸까. 아니면 시험 성적이 너무 나빠서 롤로 선생님이 공부를 하라고 얘기했나. 그것도 아니라면 말하지 못할 괴로운 일이 있어서 공부를 핑계 삼아 방에서 혼자 있고 싶은 걸까. 그러나 걱정도 잠시. 우주는 사흘 동안만 그랬을 뿐, 그 시간이 지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평소처럼 지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수영장에서 놀다가 반찬 투정하다가 동생에게 심술을 부리다가 가끔 엄마와 아빠에게 버릇없이 굴곤 했다. 나중에 우주에게 그 때는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별다른 대답을 해주진 않았다. 중요한 건 롤로 선생님으로 바뀐 후에 우주가 이전보다 훨씬 더 밝아졌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학교생활이 즐거운 것 같았다.


누리의 숙제는 아내가 봐주고 우주는 내가 봐줬는데, 미국의 초등학교 과정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 수학은 쉬웠지만 과학과 사회는 어려웠다. 수학은 수식만 알면 대부분 풀 수 있는 것에 비해서 과학과 사회는 약간의 영어 독해 능력과 해당 과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우주는 유창한 한국말에 비해서 영어 실력은 더디게 늘었다. 도착한 지 여섯 달이 지났을 때도 우주와 누리의 영어가 늘었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맥도날드와 베스킨라빈스에서는 내가 주문을 했고 아이들은 여전히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한국어만을 했으니까. 우주는 야구팀에서도 별로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가 늘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할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지만.


미국에 온 지 두 달쯤 됐을 때 시그널힐 초등학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학부모 면담을 신청하라는 공지였다. 우주는 담임 선생님이 출산 휴가를 들어가서 면담 신청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누리의 선생님만 만나기로 했다.

일주일 후에 학교를 방문했다. 학교 입구 데스크에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교무실로 들어가서 비서에게 피카렐로(피카렐라 감독과 이름이 비슷했다) 선생님을 만나러 왔다고 얘기했다. 체육관을 지나 안쪽에 있는 교실로 들어갔더니 두 명의 선생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온 걸 보더니 앉을 자리를 권했다. 피카렐로 옆에 있던 선생님도 누리 부모라고 했더니 반색을 했다. ESL(English Second Language)을 담당하는 조앤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피카렐로가 학교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학용품과 구매하는 곳에 대해서 설명했고 대략적인 누리의 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학교 숙제는 없나요?” 아내가 물었다.

“있지요.” 피카렐로가 웃었다.

“하는 걸 한 번도 못 봤는데.”

피카렐로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구불구불한 붉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찰랑거렸다. “전부 안 한 건 아니에요.”

피카렐로는 누리가 수줍음이 많지만 수업을 잘 따라오고 있다고 했다. 점심을 거의 먹지 않아서 조금 걱정된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약 때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얘기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짧은 침묵을 다른 의미로 파악한 조앤이 이번 학기에 전학 온 자신의 딸도 숙제를 거의 잘 안 한다는 이야기로 (아마도) 위로를 했다.

“참, ESL 리포트 받았죠?” 조앤이 말했다.

아내가 나를 쳐다봤다.

“아직 도착 안 했나 보네요. 다시 보내 드릴게요.”


학기 중간과 마지막에 받은 리포트에 따르면 둘 모두 영어실력이 많이 향상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우주는 베이직에서 인터미디잇으로, 누리는 어드밴스드에서 어드밴스드로. 리포트를 보면서 나와 아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학교에서는 단 한마디도 할 것 같지 않은 누리의 영어 실력이 처음부터 어드밴스드(advanced)라니. 혹시 누리를 다른 아이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알고 있기로 미국에서 누리는 오직 한 사람하고만 영어로 대화를 했다.

누리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거실에 앉아서 포터블 디브디 플레이어로 스폰지밥을 보면서 레고를 만들었다. 스폰지밥이야말로 누리가 미국에서 사귄 진정한 소울 메이트였다. 누리는 매일 비키니 씨티로 내려가 스폰지밥을 만나고, 스폰지밥과 얘기하고, 스폰지밥 때문에 깔깔댔다. 저녁이 되면 스폰지밥의 플라잉 송을 흥얼거리곤 했다. 매번 고음으로 올라가는 부분에서 켁켁 거리며 새된 소리를 냈다. 마지막은 언제나 같았다. All you need is, friendship.

누리에게 미국 생활이 어떠냐고 물으면 언제나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집에 가서 <별의 커비> 게임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낮에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밤이 되면 지나치게 명랑해지는 것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똑같았지만, 미국에서의 누리가 훨씬 더 편안해 보였다.


4학년 과정이 거의 끝나가는 5월 즈음에 시그널 힐 초등학교의 몇 개 학년은 뉴욕 주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치렀다. 한국에서라면 학교와 학부모가 합심해서 좋은 성적이 나오도록 아이들을 닦달했겠지만 이곳에서는 시험에 대한 입장이 학교 측과 학부모측이 조금 달랐다.

학교 입장에서는 시험 성적이 잘 나와야 교육청 평가가 좋게 나오기 때문에 아이들이 시험을 잘 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대개의 학부모들은 시험 때문에 아이들을 무리하게 공부시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실컷 놀아야 할 초등학생들을 공부하라고 닦달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시험이 가까워지면 학교는 시험을 보는 요령에 관한 공지를 지속적으로 보내고, 아이들이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부모들이 집에서 잘 도와주라는 협조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별다른 적극적인 조치를(예를 들면, 특별반 편성, 보충수업, 예상문제 풀이 등등)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아이들은 평소 실력대로 시험을 볼 수밖에.

우주 역시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고 시험을 봤다. 우리 부부도 우주의 시험보다는 야구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다. 방학이 될 즈음에 우주의 성적표를 받았다. 수학뿐 아니라 과학 성적도 높았다. 과학 성적이 상위 이십 퍼센트라는 사실은 고무적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동안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조앤의 평가를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누리의 어드밴스드는 의문이었다


왼쪽: 스폰지밥과 레고, 오른쪽: 생일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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