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본 여행은 내가 집도한다.
나는 정말 아빠를 많이 닮았다. 생김새는 디테일하게 닮아있다. 웃을 때 입 주변이 쑥 들어가는 것과 어깨와 쇄골의 생김새, 손목과 팔의 모양 등. 식성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격은 내가 봐도 빼다 박았다. 별거 아닌 걸로 짜증 내는 것과 화내는 포인트,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부정적인 면들도 참 비슷하다. 유전자란 무섭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나는 멀리 여행을 떠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번거로운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 아빠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멀리 가는 여행도, 하룻밤 자고 오는 여행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아 가족과의 나들이로는 도내 당일치기 정도를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아빠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변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때가 되면 강원도에 사는 이모에게 놀러 가자고 하거나 (2박 계획으로) 가족끼리 여행을 갔으면 하는 것 등이다. 하지만 여전히 해외여행에는 큰 흥미가 없다. 내가 일본에 3년 동안 있을 때 엄마와 오빠는 다녀갔지만, 아빠는 한 번도 일본에 오지 않았다. 1년쯤 전에 꼭 가족여행으로 홋카이도에 가자고 강력하게 추진해 다녀온 게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에 오지 않았다기보다 아빠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 첫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할 회사로 출근하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때는 이때다 싶었다. 엄마와는 종종 휴가를 내고 해외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아빠에게도 해외여행을 시켜주고 싶었다. 혹시 내가 결혼을 하더라도 엄마와는 단 둘이 여행을 갈 기회가 많을 것 같았지만 아빠랑 단 둘이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더 있을까.
엄마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고 엄마는 대찬성. 아빠에게 물어보니 싫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엄마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가 어쩐지 딸과 둘이 간다고 하니 어색한 모양이라고 엄마가 적극적으로 등을 떠밀어줬다. 딸과 언제 둘이 여행을 가보겠느냐고. 나중에는 가고 싶어도 못 갈지도 모른다고. 여행이 결정되고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돈을 더 쓰더라도 아빠와 가는 여행이니 기왕이면 좀 편하게 갈 수 있는 것들로 준비했다. 도심에서 가까운 김포-하네다 노선, 기왕이면 여행의 느낌이 나게 기내식 서비스가 나오는 항공편을 예약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가까우면서도 내가 잘 아는 지역에 위치한, 흔히 보이는 비좁은 비즈니스호텔이 아니면서, 호텔 앞까지 리무진 버스가 운행하는, 완벽한 뷰의 적당히 비싼 호텔로 부킹. 덤으로 아빠가 입을 가벼운 새 옷까지 구입 완료.
여행 당일 나는 서울에서 바로 김포공항으로 향했고 아빠는 새벽부터 본가에서 공항 리무진 버스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혹여나 아빠가 공항에서 나를 기다릴까 봐 여유 있게 도착했다. 아빠가 복용 중이던 혈압약을 놓고 온 에피소드는 있었지만 심한 증상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수속 절차를 밟고 면세 구역으로 들어왔다. 인터넷 면세점으로 주문한 제품을 찾으러 가려고 하는데 아빠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도 뭐 살 거 있어"
나는 알고 있었다. 아빠가 담배를 살 거라는 걸. 면세 인도장에는 중국 관광객이 늘어서 꽤나 기다려야 했는데 마음이 급해진 아빠 먼저 담배를 사러 갔고 한 보루당 얼마씩이 싼 지 신나게 얘기하던 아빠. 어렸을 때는 아빠가 담배를 피우는 게 싫었고 하루빨리 끊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내가 어른이 되고 아빠가 담배를 끊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거 하나쯤은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먹은 이후에는 내 몫까지 아빠의 담배를 산다. 그냥 하루에 적당량만 피우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아빠를 창가 자리로 앉히고 이윽고 비행기가 이륙, 아빠의 입국신고서까지 작성했다. 두 시간이라는 짧은 비행시간에 기내식과 맥주도 한 캔 받았다. 따지고 보면 크게 맛있지 않은 기내식과 많이 먹지도 못하는 맥주를 먹는 것은 하늘에서 먹는다는 그 기분 때문이다. 그 설레는 기분을 아빠와 함께할 수 있어 기뻤다. 밥을 먹고 아빠는 계속 창밖을 쳐다보고 또 쳐다봤다. 틈틈이 비행기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좌석 앞의 모니터를 쳐다보면서 말이다. 아빠를 쳐다보며 왜 진작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나 후회스러웠다.
무사히 도착해 짐을 찾으려 할 때 또 한 번의 에피소드. 캐리어가 벨트를 돌고 있어 내리려고 택을 보니 우리 가방이 아니었다. 그런데 결국 그 가방만 남은 채 벨트가 멈춰버렸다. 우리 캐리어와 똑같은 캐리어를 가진 사람이 택을 확인도 안 하고 우리 가방을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 급하게 직원을 찾아 상황을 설명하자 아마 멀리 가진 않았을 거라며 직원 여러 명이 가방을 찾으러 뛰어나갔다. 제발 멀리까지 가지 않았기를 바라며 일단 분실신고서(?)를 작성했다. 작성이 끝나기도 전에 직원이 우리 캐리어를 찾아 돌아왔고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 너무 다행이었다. 그 캐리어에는 엄마가 S언니에게 줄 반찬을 만들어 담아줬기 때문에 당일에 가방을 찾지 못하면 음식이 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상황을 더듬거리는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편안히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바로 호텔 앞에 내렸다. 체크인 시간이 남아 캐리어만 맡기고 가볍게 근처를 돌아봤다. 일부러 일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 아는 장소인 요코하마의 미나토미라이 지구에 호텔을 잡았기 때문에 아빠 옆에 붙어서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아빠 내가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야! 여기는 원래 바다였는데 매립해서 만든 곳이고 만국박람회도 열렸어! 저 스카이라인은 파도를 형상화해서 만든 거고 저 호텔은 돛을 형상화한 거야! 엄마가 일본 왔을 때 여기도 자주 왔었고 저 관람차도 탔었다구! 엄마가 얘기했던거 기억나?”
조잘거리는 와중에 아빠는 호텔 앞에 있는 흡연 장소를 찾아냈다. 일본은 야외에도 흡연 장소가 마련이 잘 되어있어 대분의 흡연자들은 지정 구역에서만 흡연을 한다. 아빠의 관찰력에 웃음이 터졌다. 산책 겸 걸어서 조금 늦은 점심으로 아빠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었던 식당에 갔다. 1868년에 개업한 유서 깊은(?) 식당으로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이 다다미방으로 안내를 해주고 중정이 보이는, 한마디로 요정 같은 분위기의 식당이다. 꽤 금액대가 있고 예약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라 미리 한국에서 예약까지 해두었다. 종업원은 여행객임을 알아보고 먼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고 이 사진이 일본에서 타인이 찍어준 유일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밥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상인회에서 주최한 작은 마츠리를 보게 되었고 사람 사는 풍경에 아빠는 마음을 빼앗긴 듯 보였다. 음악을 틀고 포장마차를 내놓은 떠들썩한 모습이 즐거웠고 준비한 공연을 하는 모습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아빠는 아직까지도 얘기한다. 비싼 곳에서 좋은 음식 먹은 것도 좋았지만 사람들이 아기자기하게 준비한 마츠리를 본 게 너무 좋았노라고.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