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관람차가 보이는 호텔
아빠와 단둘이 여행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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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피식대학 한사랑산악회 에피소드.
선옥(딸)이 택조(아빠) 아저씨의 공인인증서를 설치해주며 지난번에 알려줬는데 왜 까먹었냐며 온갖 짜증을 내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내용이 있다. 택조 아저씨는 선옥이가 어렸을 때 까치를 보며 무슨 새냐고 백번을 물어봐도 백번을 대답해줬는데 이제는 컸다고 귀찮아한다며 쓸쓸해하는 얼굴을 한다.
아 아버지여...
이 에피소드를 보고 너무 웃기고 짠하고 내 이야기 같기도 해서 아빠에게도 보여드렸더니 택조 아저씨 연기력에 감탄, 재밌다며 감탄, 우리 딸은 저렇게 소리는 안 지른다며 안심(?)하셨다. 우리 딸은 아빠가 모르는 거 물어보면 놀릴 생각에 신나서 웃으면서 온다고. 칭찬이야 아빠?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아빠와의 일본 여행이 떠올랐다.
아빠와의 일본 여행에서 가장 신경 쓴 것이 호텔이다. 리무진 버스로 바로 갈 수 있고 지하철역이 근처에 있어야 하고 주변에도 볼 것이 많아 멀리 가지 않아도 쉬엄쉬엄 돌아보며 피곤하면 호텔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비즈니스호텔처럼 손바닥 만한 방도 안된다. 몇 곳의 후보를 추려냈고 아침을 꼭 잡수시는 아빠를 위해 예약을 하며 조식까지 신청했다.
참새방앗간처럼 드나들던 요코하마의 미나토미라이역과 연결되어 있고 두 개의 쇼핑몰과도 바로 연결되어 있는 호텔. 무엇보다 발코니를 통해서 들어오는 뷰가 대단하다. 요코하마의 바다가 보이고 랜드마크인 관람차가 보인다. 만에 하나 피곤해서 일찍 호텔에 돌아오더라도 발코니에 나가 야경을 보며 호사스럽게 쉴 수 있겠다 싶었다.
리무진은 바로 호텔 로비에 내려줬고 날은 또 얼마나 좋던지 오며 가며 올려다본 호텔은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새롭게 느껴졌다. 방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고 테라스로 나가자 바다와 관람차가 우리를 맞이해 주고 있었다. 가족 여행 때 홋카이도 오타루의 작은 비즈니스호텔 사이즈에 여관방 같다며 놀란 적이 있던 아빠가 이번 호텔은 마음에 들까 걱정됐었는데 누구라도 이 뷰를 싫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빠는 아침저녁으로 테라스에 앉아 밖을 구경하며 핸드폰도 보다가 음악도 들었다. 엄마도 같이 왔으면 좋았겠다며 다음에는 같이 오자며 앉아서 두런두런 얘기를 했다. 무엇하나 급할 것 없는 일정에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스폿만 찍고 돌아다니는 패키지여행을 질색하는 아빠는 한가로운 일정을 내심 마음에 들어 하셨다. 아침에 아빠가 나갈 준비하는 동안 후다닥 쇼핑몰로 뛰어내려 가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옷도 살 수 있었다. 아빠가 호텔의 흡연 구역에서 담배라도 피울 세면 부리나케 쇼핑몰로 달려가 짧은 쇼핑도 맛보았다. 역과 호텔과 쇼핑몰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나를 위해서도 최선의 위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엄마와 둘이서 다닌 여행에서 깨달았던 나의 야매 가이드로써의 불만족스러운 점은 오늘의 일정을 상세히 브리핑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어디를 가는지, 그곳은 무슨 의미가 있는 곳인지, 무엇을 타고 어떻게 가는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를 미리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아는 코스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다녔던 건데 엄마는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게 내심 답답했던 모양이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아빠와의 여행에서는 그러지 않아야겠다 마음먹었다.
나야 많이 오갔던 곳이기에 호텔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지만 초행길은 조금 복잡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아빠와의 여행에서는 최대한 많은 것을 설명했다. 호텔에서 나와 쇼핑몰을 지나 지하철역을 가는 법, 오늘의 목적지, 지하철은 얼마나 가서 갈아타는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지하철 카드는 어떻게 충전하는지 등등. 내 설명이 부족하진 않았을까 지금도 가끔 뒤돌아보게 된다.
외출 후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장난 가득한 얼굴로 아빠에게 지하철역에서부터 호텔까지 길을 찾아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는 자신 있게 앞으로 가며 잘못된 곳으로 가기 시작했다. 두 개의 쇼핑몰과 연결되어 있는 데다가 에스컬레이터도 여러 개가 있고 모든 층을 연결한 것도 아니어서 확실히 헷갈리기는 했다. 어? 여기가 아닌데? 하며 웃으면서 아빠는 나에게 "너 어렸을 때는 아빠가 다 데리고 다녔어 임마” 하기에 장난을 그만두고 호텔까지 안내했다. 그럼에도 흡연 구역 가는 길은 절대 헤매지 않으셨지만.
일본에서는 보호자 관계가 역전되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당연히 나의 보호자가 아빠라고 생각했는데 잠시나마 보호자 관계가 역전되니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과 동시에 흘러가는 아빠의 시간이 애달팠다. 가끔 아빠의 입에서 그 시절 유명했던 서부 영화배우들의 이름이 나오거나 7~80년대 외국 음악 제목들이 나올 때, 아빠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볼 때면 젊은 아빠를 생각해보게 된다. 아빠에게도 자연인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아빠와 단둘이 여행을 하면서 자연인으로써의 아빠의 모습을 보게 되어 좋았다. 멋진 풍경이 있으면 기꺼이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신기해하며 들여다보는 모습. 평소와는 다르게 이곳저곳 들어가서 먹어보자고 권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먼저 관람차를 타보자는 말도 생소하지만 반가웠다. 쇼핑이라고는 흥미도 관심도 없는 아빠가 돌아가기 전에는 주변 사람들의 선물을 열심히 고르는 모습도 신기했다.
나중에 내가 아빠의 보호자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도 아빠도 우리의 여행이 즐거웠노라 기억해주길 바란다.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