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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윰글 Oct 31. 2023

그런 수업은 아니라고 봅니다

학부모 공개수업-1

의기소침


"선생님, 저희 아버지는 내일 수업을 보러 못 오신대요."

"지선아, 아버지께서 학교에 꼭 오지 않으셔도 돼. 공개수업은 부모님이 꼭 오셔야 하는 건 아니란다. 시간이 되시는 분만 오시면 되는 거야."


우리 반 지선이(가명)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공개수업을 할 때 반 아이의 모든 학부모님이 참관을 하러 오시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막상 공개수업에 부모님이 오지 못하는 아이는 지선이처럼 의기소침해한다.   


"엄마는 왜 공개수업에 오지 않아요? 다른 엄마들은 다 오시는데요."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방과 후나 학부모 공개수업을 할 때 내가 수업을 보러 가지 못한다고 하면 나에게 투덜대며 늘 하던 말이다. 우리 반의 수업을 빼먹고 내 아이의 수업을 보러 간다는 것이 그때는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교사에게 '자녀 돌봄 휴가'라는 제도가 생겨서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공식적인 행사가 있는 경우 학교에 휴가를 내서 참가할 수 있다. 이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나는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도 학부모 공개수업에는 일절 참석하지 않았다. 이런 나에게 못내 서운했던 둘째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늘 투덜댔다.


"엄마는 언니, 오빠들의 수업을 안 하고 너희 학교에 수업을 보러 가기가 어려워. 그러니, 00 이가 이해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 알았지?"


둘째 덕에 지선이의 어두운 눈빛이 더 신경 쓰였다.  하지만, 내가 해주는 위로의 말을 들은 지선이는 금세 얼굴이 밝아져서는 슬쩍 나와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짓는다. 작년까지 우리 학교는 원격으로만 수업을 공개했다. 그래서, 반 전체 아이들 중에서 서너 명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학부모님들이 모두 접속하여 아이들의 수업하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올해는 학부모가 직접 교실에 와서 아이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었다. 입학을 하고 첫 수업공개라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기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업  참관을 신청한 학부모는 우리 반 전체 아이들이 23명인데 그중 16명 정도이다. 거기다가  첫 공개수업이니 아이 한 명당 참관자가 한 명일 리가 없다. 그러면 교실은 참관하는 사람으로 꽉 찬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부모님이 오지 못하는 아이는 있다.


'공개수업 의무화'


교육부에서는 이 공개수업을 의무화한다는 말을 한다. 만일 공개수업을 법제화하면 이렇게 참관을 하러 오지 못하는 부모님의 아이는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을지 교사의 입장에서는 걱정스럽다. 교육부에서 이런 가정의 개인 사정을 고려한다면 '공개수업 의무화'와 같은 성급한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불협화음


"그런 수업은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네?"


예전에는 공개수업을 교사 각자가 알아서 준비했다. 하지만, 요즘은 대부분 학년에서 공동사고를 통해 한 가지 수업을 진행한다. 특히, 학부모 공개수업은 대부분 같은 차시의 수업을 같은 지도안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동학년 교사들이 같은 차시의 수업을 준비하면서 수업의 수준을 높일 수도 있고, 각 반별 차이를 줄임으로 인해서 불필요한 학부모 민원의 소지도 삭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사로서 같은 수업을 하는 이유로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더 큰 의미를 둔다.


우리 학년에서도 수업을 선택하는 과정부터 학년에서 협의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는 누군가 한 명은 수업의 과목, 차시 선택에서부터 지도안 작성, 수업자료의 제시 등 세부적인 사항까지 진행을 주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보통은 경력이 조금 낮은 후배님들이 이 역할을 하고, 선배는 그 뒤를 따른다. 아무래도 임용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업의 최신 흐름을 알고, 이런저런 자료를 준비하는 능력도 좋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학교처럼 연구학교 프로젝트를 연계해서 준비해야 하는 경우에는 선배가 뭘 돕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솔직히 요즘의 나는 보직을 내려놓아서 기획위원회(부장 회의)에 들어가지 않는데, 이런 경우에는 학교 전체의 업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연구학교의 방향성에 위배되는 지도안을 작성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후배가 하는 부분을 거스르지 않고 찬성하며 따르려고 한다.


하지만, 올해는 이런 나의 생각이 이상하게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세상 일은 상황에 따라 그리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선 ㄱ수업공개의 과목을 선택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차시는 당연히 오락가락 오리무중을 달린다. 평소처럼 "저는 어떤 과목, 어떤 차시를 해도 좋습니다."라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이 어떤 분에게는 "수업은 대충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들린 모양이다.


"그렇게 대충 하는 수업을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학부모 공개수업이지만 그렇게 수업을 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는 것 같았다. 상대의 기분이나 생각은 배려하지 않고 본인의 마음대로 말을 던지는 사람에게 한 마디 하고 싶었다.


"수업이라는 건 지도안을 보고 하는 것이지만, 교사가 교실에서 만들기 나름 아닌가요. 어차피 수업이라는 게 같을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수업은 대충일 거라고 확신하는 걸까. 그 오만함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어린 후배가 같이 있었기에 내가 더 이상의 질문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 자리에서 학년부장에게 이래저래 말을 더 하면 결국은 '후배가 선배에게 대드는 것'이 된다. 수업 협의는 결국 학년 부장이 원하는 과목과 차시로 정해졌다. 나도 그 방향에 동의했다. 물론, 그 과목, 그 차시를 하더라도 나는 상관이 없다. 결정만 하면 되는데 후배가 정해온 수업은 다 뒷전으로 놓고, 본인이 다른 수업을 찾느라고 우리 둘을 본인의 교실에 30분 이상 자신의 수업 검색을 하는 모습을 구경시키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것을. 나는 그 교실에서 수업을 검색하는 부장의 모습을 영화장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30분 가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후배는 화가 나지 않았을까. 미리 다 검색해서 준비해 왔을 텐데...'


"저는 눈치가 없어서인지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센스가 있는 후배의 한 마디에 난 내가 아직도 부족한 사람인가라고 반성했다. 조금 더 참았어야 하는 건가.





수업 공개 전날


퇴근하면서 교실을 들여다봤다. 칠판에는 학습목표가 적혀있고, 중요단어를 붙일 자리는 비워져 있었다. 내일 수업을 진행하면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그 답을 듣고 붙일 '키워드'를 출력한 후 오려서 그 뒷면에는 원자석을 붙여두었다. 미술대학을 다니는 큰아이에게 부탁해서 조금 꾸며달라고 할 생각으로 가방에 챙겨 넣었다. 지도안을 충분히 숙지하고, 필요한 수업자료는 적재적소(?)에 비치해 두었다. 수업의 동선을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할 수업 안내 멘트를 미리 연습했다. 한 시간을 위해서 교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궁무진하다.



'메모에 메모를 더하다.'


혹시 내일 아침에 잊을까 싶어서 모니터 아래에 놓인 메모보드에 출근하자마자 해야 할 일을 10가지 정도 적어두었다. '게시판의 빠진 작품 붙이기'부터 수업의 첫 멘트, 그리고 파워포인트 미리 띄워두기 등. 지금 미리 해둘 수 없는 부분에서 수업의 진행을 위한 상세한 부분까지 메모해 두었다. 예를 들면 아이들 화장실 보내기, 그리고 가방을 정리하기 등. 수업은 그 수업의 형태나 참관을 하는 분들의 범위에 따라서 준비의 수준이 다르다. 교실의 불을 끄고 내려오면서 선배님의 교실에 잠시 들러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수업준비는 잘하고 계시죠?"

"이제는 뭐 그냥 하는 거지."


"내일 수업 참관을 하러 오지 않는 아이들은 서운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좀 하려고요. 너희 중에서 오늘 부모님께서 오지 않는 분도 계실 거야. 그렇지만, 선생님도 우리 아이 수업을 보러 가지 못했어. 하지만 별일 없이 수업을 잘했다고 들었단다. 그러니, 부모님이 이 자리에 계시든 그렇지 않든 평소처럼 공부하면 되는 거란다. 그렇게 할 수 있지?"


"나는 수업이 끝나고 엄마나 아빠에게 달려가서 안기거나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할 거야."

"그래야 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저는 혹시 부모님께서 오지 않은 분들은 선생님에게 와서 안기세요라고 말할래요. 그러면 다들 좋아서 저한테 와서 안기지 않을까요?"


"부모님들은 오히려 본인들에게 와서 안기려고 하면 '선생님께 가라'라고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럴라나."


같이 계시던 선생님들은 그 장면이 상상되지 않는다면서 "한 번 말해볼까?"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수업 참관을 하러 오지 않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보러 오시든 말든 "당당하라"라고 말하고 싶다. 그건 내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똑같이 말했던 내용이고, 그만큼 의젓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우리 반 아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내일의 한 시간을 위해 그동안 너희도 충분히 성장했고, 내일은 그 수업의 과정에 부모님이 잠시 같이 하시는 것뿐이란다. 더 잘하려고 하지 않고, 평소처럼 공부하면 돼. 우리 내일 만나자.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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