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병진은 미래를 살았다. 신사업 기획부서에서 8년을 보내는 동안 팀장이 지시한 미래와 임원들이 가리키는 미래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업무 폴더엔 마감일을 기준으로 프로젝트들이 줄지어 정리되어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미래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급여에서 매달 빠져나가는 연금보험료가 30여 년 후에, 몇 푼의 월 수령액으로 바뀌리라는 사실 외에는 모든 게 아득했다. 그렇다고 병진이 그 모순을 매일 인지하고 사는 건 아니었다. 모순은 손에 박이는 굳은살처럼 눈치 채지 못하게 아주 조금씩 쌓이다가 야근 후 택시 안에서 혹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예기치 않게 터져 나왔다. 병진은 그럴 때마다 5일짜리 휴가를 내고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항공권 가격비교 앱이 결정했다. 이번엔 최근에 발화한 화산 덕분에 하와이행 표가 47퍼센트 할인된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하와이 군도 중 가장 큰 섬인 빅 아일랜드에 위치한 화산이 2주째 용암과 화산재를 뿜어댔다. 용암이 도로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수십 명이 고립되었다가 헬기로 구출되었다거나, 자기 집 발코니에 서있던 남자가 날아온 용암 덩이에 허벅지를 크게 다쳤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관광객들이 여행을 취소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병진은 과거로 이동해 있었다. 분명 이륙시간은 금요일 밤 9시였는데 도착해 휴대폰을 켜자 19시간의 시차 덕분에 오후 1시로 돌아와 있었다. 오후 1시에 그는 부장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심과장이 맡고 있는 부사장님 직보 건 있잖아. 그거, 돌아오면 병진이 네가 맡아줬으면 해.”
부장은 부탁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달리 직급 대신 이름을 불렀다. 일대일로 점심을 먹자고 할 땐 늘 어젠다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지만, 동료와 겪게 될 껄끄러움과 성미 급한 부사장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르자 두통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