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거기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두 번째 광주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골프장까지 따라온 기자에게 건강한 모습을 들키기도 하고, 다섯 권짜리 자서전을 내면서도,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주장하던 때였어요. 저도 처음엔 제가 하게 될 일이 전이랑 관련되었단 사실에 듣곤 너무 놀랐고...... 고민했습니다. 석사 지도교수님이 소개해준 일자리였죠. 그 당시에 어머니가 허리를 다치시는 바람에 식당일을 관두게 되면서, 근근이 차변 대변을 맞추던 가계가 휘청거렸어요. 가난한 집 장남 주제에 20대 후반이 되도록 제 욕심에 공부 중이었거든요.자괴감, 정의감 이런 건 사치였단 말입니다. 물론, 몸이 부서져라 아르바이트 자리를 동시에 여러 개 구했다면 불가능하진 않았겠죠. 하지만 그럼 공부랑 병행이 불가능했어요. 아들 교수된다고 그것만 바라보던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었죠. 거기에 4대 보험이 되는 직장이었어요. 어머니 병원비가 해결되니, 정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첫 달 월급을 받고 울었어요.”
복잡한 얼굴로 병조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 사람 잔심부름... 이를테면 돼지불고기 백반이 먹고 싶다 하면 자주 가는 기사식당에 가서 사 오고, 어디 유명한 떡집 가서 흑임자 떡 사 오라면 다녀오고, 화분에 물 주고, 잔디도 깎고, 컴퓨터나 프린터가 안 된다고 하면 가서 봐주고, 그런 잡다한 일들을 했어요. 받는 돈에 비하면 정말 쉬운 자리였죠. 대면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말하자면 그 사람 비서의 비서쯤 되었을까요, 제 위치가? 물론 짐작하시겠지만 몇 번 험한 일을 당하기도 했었죠. 다혈질에, 각종 콤플렉스, 대인기피증과 군인으로서의 지배욕 등이 그 노인네 안에서 충돌했는데, 어떤 날은 그게 모욕으로, 또 어떤 날은 발길질의 형태로 터져 나왔어요. 난 그게 역사학도로서 그 일자리를 맡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벌이라고 생각해서 억울하지도 않았어요. 가끔은 자려고 누웠다가 일어나서 제 뺨을 세게 몇 번 때리고 다시 눕기도 했거든요. 박사과정 마칠 때까지 4년을 일했죠. 그게 난 매춘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지금 제가 여기 와 있는 이유와 관련이 있나요? 국립대 총장 후보로 거론되면서... 터져 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제가 직에 욕심이 없는 줄 알지만, 전 알았죠. 너무 높은 위치에 가게 되면 그 일은 반드시 밝혀진다고요. 뒤에서 수군대는 거랑 공론화하는 건 다른 이야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