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아까운 줄 모르고 자란 애들은 피부가 달라요. 어떻게 그렇게 잡티가 하나도 없죠? 티 없이 자라면 잡티도 없는 건지. ‘반포동글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그 여자한테 제가 영국 왕실에서 쓴다는 커피잔을 샀어요. 손잡이 쪽에 조그맣게 이가 나가서 오천 원에 올라와 있었죠. 제가 다음날 픽업하러 간다니, 산책 겸 온다며 집 앞으로 가져다준 거예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민트색 티파니 쇼핑백을 내밀었어요. 그걸 받아서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데 기분이 더러웠어요. 뼈저린 열패감이 드는 거죠. 중고 거래 따위가 아니라면 우리의 세상은 겹칠 일이 없겠구나. 그 잔이 이가 나가지 않았다면 써보지도 못하는 것처럼.
분명히 속으론 ‘우리 동네에 이런 곳도 있구나' 그랬을 텐데,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끝까지 상냥했어요. 더 기분 나쁘게.”
진주가 얼굴 앞으로 쏟아져 내려온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집어 귀 뒤에 꽂았다.
“다음날이 쉬는 날이었거든요. 원래 직거래 장소로 적혀 있던 아파트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죠. 하염없이 아파트 입구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 여자가 형광 오렌지 빛 원피스를 입고 총총거리며 제 쪽으로 걸어오더라고요. 전 몸을 일으켰죠. 어딜 쳐다보는지 제 존재를 인지조차 못하더라고요. 제 옆을 막 지나쳐 가려는 차에, 보온병을 열어 뜨거운 물을 그 여자 머리에 들이부었죠. 비명을 들은 것 도 같은데... 전 그냥 뒤돌아 왔어요. 으리으리한 아파트 입구에 행인이 딱 그 여자랑 나 둘 뿐이었거든요. 집에 오는 길엔, 저만 아는 작은 골목길들을 모두 거쳐 돌고 돌아왔죠. 집에 도착해선 잔잔한 장미 그림이 그려진 그 잔을 찬장에서 꺼내, 미국에서 가져온 얼그레이 티백을 천천히 우려냈어요. 여전히 이 나간 게 눈에 띄었지만 고급 잔이라 그런지 그립감이랑 입에 닿는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여긴 경찰서인가요? 제가 정말 잘못했다고 전해주세요.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형사님, 꼭 좀 부탁드려요. 제가 미쳤었나 봐요.”
진주는 두 손을 꼭 모으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기괴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증인 521호, 왜 그랬어요?”
“무얼 말입니까?”
맞은편 여자의 이마가 조명을 받아 빛났다. 병조는 여자를 보며 학부생들보단 조금 나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빛이 그 아이들보단 조금 더 깊어 보였다. 깔끔한 올림머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의 정장 차림. 정보기관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 같다는 인상이 풍겼다.
“왜 그랬어요?”
반복되는 질문에도 노인은 침묵했다. 살면서 섣불리 답하는 것보단 확률적으로 침묵이 낫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상대에 관한 정보가 없을 때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