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겁에 질려있었다. 처음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지만, 과장된 여유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잘못했어요. 그게 그런데...... 그렇게 뜨겁진 않았을 거예요. 거기 앉아 있는 동안 식었을 텐데. 보온병도 오래된 거라, 분명히 식었을 거예요.”
검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진주는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왜 그랬어요?”
눈앞의 여자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진주는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 죽인 채 눈물을 떨구던 그녀는 노릿한 타는 냄새에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두들겨 불 끄는 시늉을 했다. 사방에서 단백질 타는 역한 냄새가 나는 가운데 그는 몇 년 전 이혼을 결심했던 그 아침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는 그녀의 머리에 남편이 불을 붙였었다. 덕분에 베개까지 타버렸던 그 아침, 매캐한 연기 속에서 자신의 결혼생활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었다.
“제가 사는 낡은 아파트는 반포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한 동짜리 아파트예요. 이혼하면서 부모님 집으로 다시 왔을 때 아파트는 더 낡아 있었어요. 외벽은 잔금이 없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려웠고. 학교 다닐 때...... 애들이 어디 사냐고 물어보면 얼버무렸던 기억이 떠올랐죠. 집에 애들이 오는 게 싫어서, 학창 시절 내내 친구를 깊이 사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집에 갈 때 일부러 빙빙 돌아오기도 했고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사는 곳을 포함해 숨기고 싶었던 것들 때문에, 나를 많이 보여줘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포기했던 거예요. 그땐 몰랐지만요. 술 마시면 서로 물건이고 뭐고 던지며 싸우는 부모와 가난, 그냥 이 집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벗어나려는 마음이 너무 커져서, 결혼할 사람인데... 제대로 못 봤어요. 아니 외면한 거죠. 부유한 집 아들에 미국에 박사 유학을 간다니까, 웃을 때조차 그 새끼...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던 거나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 인사 가서 목격한 장면들, 대놓고 기사한테 쌍욕을 한다든지 하는....... 경고를 무시하기로 한 거예요. 아니, 솔직히는, 내가 이런 경제적 수준의 집으로 가려면 완벽할 순 없다. 결혼하면 남편과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해버렸어요.”
말하는 진주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의 두 눈은 뚫어질 듯 책상 위의 한 지점을 응시했다.
“순진하고 영악하죠? 그때의 저를 떠올리면, 안쓰럽고 혐오스러워요.
그 변태 새끼랑 이혼하고 미국에서 돌아와, 엄마가 일하던 미용실에서, 엄마가 하던 보조일을 하는데, 딱 죽고 싶었어요. 앞머리를 길러서 눈을 거의 다 덮고, 아무도 날 못 알아봤으면 했죠. 그러다가 중고 거래를 하러 간 자리에서 그 여자를 만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