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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Oct 19. 2021

틈 3화

훤이 작업실로 오기로 한 금요일, 아운은 와인을 한 병 산다.

금요일 오후 아운은 한강 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잎사귀를 모두 잃은 겨울나무들은 허리를 곧게 편 채 홀가분한 듯 서있었다. 여름엔 무성한 잎사귀로 뒤덮여 곡선으로 휘어졌던 가지들이 이맘때면 가느다란 직선이 된다. 조용한 거인을 닮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늘어선 산책로를 따라 걷던 아운은 유독 새 둥지가 여럿 자리한 나무 아래에 이르자 눈을 감았다. 추운 날의 산책길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 좋았다. 자신이 새들의 아파트라고 이름 지은 나무 아래에 서서 그녀는 부지런히 오가는 지저귐에 귀를 기울였다. 겨울 햇살이 아운의 얼굴에 닿았고, 귓가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과 만나 묘한 온도를 만들었다.


눈을 감은 채 아운은 자신이 그리고 있던 여자의 타오를 듯한 주홍빛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인터넷으로 찾은 이미지 속 붉은 단발머리의 여자는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 돌아설 듯 말 듯 한 몸짓으로 서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불러 돌아서려는 찰나에 찍힌 것만 같은 사진이었다. 여자의 실루엣을 빛의 띠가 감쌌는데, 빛으로 도려낸 것과 같은 그 지점이 그림의 구심점이었으므로 아운은 색을 고르는 데에 신중했다.


얼마간 서 있었을까, 정수리에 손을 가져가니 따뜻했다. 아운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후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부셨지만, 세상이 또렷이 드러나는 그 순간을 그녀는 좋아했다. 햇살이 붓털같이 가느다란 가지들을 감싸거나, 바위 위에 올리브색과 연보라색으로 떨어진 모습, 강 표면에서 요란하게 빛나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아운은 문득 그림에 짙은 노란색을 더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가는 길엔 와인을 한 병 사야지. 작업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동네엔 초가을에 오픈한 ‘동네 와인가게’라는 이름의 와인 숍이 있었다. 40대 중반의 안경 쓴 주인은 오랫동안 대기업에서 회계 쪽 일을 했을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적당한 호기심과 지루함이 버무려진 표정이 어울리는 남자. 혼자 와인 한잔하기를 좋아하는 아운은 옷이나 신발에 돈을 아껴도, 와인엔 매달 꼬박꼬박 5만 원 정도의 예산을 배정했다. 달랑거리는 종이 달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카운터 뒤에서 기타 연습 중이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 오셨네요.”


“오늘은...... 음, 겨울밤이랑 잘 어울리는 와인 좀 추천해주세요. 애매하죠...”


아운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애매한 게 어디 있어요? 그러면 그런 거지.”


주인은 일어서서 카운터를 돌아 나왔다. 아운의 뒤쪽 선반에서 그는 검은색 라벨이 붙은 와인을 꺼내, 아운 쪽으로 들어 보였다.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게 와인 이름인데요, 스페인 남동쪽 후미야(Jumilla) 지역에 와이너리가 있고, 포도밭이 해발 900미터 높이에 있어요. 강수량이 매우 적은 지역인데 토양은 수분을 잘 머금으면서도 배수가 잘되는 백악질이라 최상의 품질로 포도 재배가 가능하죠. 게다가 유기농 와인이고요. 좋아하실 것 같아요.”


라벨엔 커다란 해골이 그려져 있었고 해골의 이마에 금색으로 TIME WAITS FOR NO ONE이라고 적혀있었다. 아운은 손때 묻은 명함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와인 값을 계산했다. 기다란 쇼핑백을 흔들거리며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멈춰 서서, 장갑을 벗고 훤과 톡을 주고받았다.


‘운, 회사 앞에 타코야끼랑 롤 맛있게 하는 집이 있는데 그거 사갈까?’


‘좋지.’


몇몇 사람이 지나가며 그녀와 어깨를 부딪쳤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하는 아운을 두고, 헤어진 남자 친구는 답답해했고, 이별할 무렵엔 시대에 맞지 않는 인간 유형이란 말을 했었다. 결국 이직엔 성공했을까. 이번 달엔 무조건이야. 주문 혹은 푸념처럼 외치던 그의 말을 아운은 떠올렸다.




그림: tae-hope https://www.instagram.com/barista_painter/

와인 설명: 목동 와인 https://www.instagram.com/p/CI2IT71B1b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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