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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자 농부 Oct 19. 2021

틈 4화

작업실에 온 훤은 아운의 그림이 궁금하다.

작업실로 돌아온 아운은 창을 등지고 앉아 여자의 가슴에 내려앉은 햇살을 덧칠했다. 아이보리에 카드뮴 옐로 딥과 나폴리 옐로 휴를 섞어가며 햇살의 온도를 조색했다. 겨울은 해가 짧아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작업실로 왔어야 했는데 새벽 3시쯤 잠들어 11시쯤 일어나는 생활습관 탓에 자연광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매일 밤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지, 마음먹으면서도 잘 되지 않았다. 습관이란 것을 바꾸는 데엔 엄청난 힘이 드는 일이며, 시발점엔 가슴을 후벼 파는 사건이 필요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그럴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운은 그리다 말고 일어나 형광등을 켜고, 세 발자국 뒤에서 캔버스를 바라봤다. 그림과 삶 모두 세 발자국 뒤에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여자의 머리카락과 손가락 끝의 밀도를 올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작업실의 초인종이 울렸다. 벽시계는 8시를 가리켰다. 문을 열자 훤이 일어가 적힌 종이봉투를 내밀며 웃었다. 이틀의 자유 시간을 앞둔 직장인의 홀가분한 미소였다. 겨울바람을 맞아 흩날린 머리카락도 금요일 밤의 얼굴과 어울렸다.


“계단 되게 많더라.”


훤의 숨이 거칠었다.


“계단이랑 월세는 반비례 관계야. 올라올수록 싸지."


아운은 작업실 한쪽 벽면에 세워두었던 2인용 탁자를 가운데로 옮겨 와, 할머니가 물려준 꽃무늬 접시를 꺼내 연어롤과 돈가스 롤, 타코야키를 담았다.


“와인병 모으는구나.”


“버리기 귀찮아서.”


훤은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와인병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병을 하나씩 들어 라벨을 확인했다. 아운이 와인을 잔에 따른 후 내려놓자 훤이 이번에도 병을 들어 유심히 살폈다.

“시간은 누구 기다려 주 않는다. 시간이 다 가버리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하란 소린가?”


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시간이 공평하구나. 그렇지. 싶었어.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스티브 잡스나 이건희도 결국 다 죽었잖아.”


아운이 잔을 기울여 와인의 색을 확인하곤 한 모금 마셨다.


“작업은 재밌어?”


훤이 와인 잔을 빙빙 돌리며 물었다.


“지겨울 때도 있는데, 어떤 날은 꼴 뵈기도 싫고. 그래도 가만히 생각하면 음... 더 잘 그리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어.”


둘은 동아리 엠티 때 마피아 게임 중 선배들끼리 싸움이 났던 일, 술에 취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다 병준이 발목 깁스를 했던 일 등을 안주삼아 와인을 마셨다. 금요일 밤의 너그러움과 와인이 만나 몸이 따뜻해졌고 둘 사이에 남아있던 어색함도 점점 옅어졌다.


“너 그림들, 봐도 돼?”


병준의 질문에 아운이 한참 뜸을 들였다.


“응, 봐도 되는데...... 난 이제 그러면 안 되는 데도 부끄러워. 너도...... 이 기분 알지?”


“알지... 숨고 싶잖아. 내가 쓴 카드를 내 앞에서 소리 내 읽는 것 같은......”


“맞아. 그거지. 꼭 무대 위에 발가벗고 서서, 나... 어때? 하고 묻는 것 같아. 허리춤의 커다란 몽고반점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기분이랄까.”


“그럼 다음에 봐도 돼.”


“아니야, 같이 보자.”




그림: tae-hope https://www.instagram.com/barista_pa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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