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네 그림은 선이 좋아. 학교 다닐 때도 좋았는데 더 좋아졌어. 요즘 작가들 sns로 작품도 팔던데, 너도 올려?”
“응. 다는 아니고. 거긴 정말 좋은 작품들이 많거든. #그림을 팔로우하는데... 어떤 날은 굳이 세상에 내 그림이 하나 더 필요한가 싶기도 해. 이렇게나 좋은 그림이 많은데 말이야.”
둘은 캔버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상가건물이라 저녁이 되면 추워지는 터라 작은 전기난로를 곁에 두고 두 사람은 그림을 하나씩 넘겨가며 감상했다. 훤의 우디한 향수 냄새가 아운의 코 끝에 걸렸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 시원하면서도 묵직한 향을 좋아했단 사실을 기억했다.
“난 좋다. 그리고 아름다운 건 많을수록 좋지. 추한 건 차고 넘치잖아.”
벽에 붙여둔 그림까지 모두 둘러본 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저쪽에 편하게 앉아봐, 너 앉고 싶은 대로.”
아운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낡은 호두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훤은 왼쪽 다리 위에 툭 오른쪽 다리를 걸쳤다. 통이 넓은 검은 바지에 잡힌 주름이 제법 멋진 그림자를 만들었다. 오버사이즈 후드티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앉은 그의 눈 아래엔 오늘도 다크 서클이 걸려있었다. 아운은 재즈음악의 볼륨을 조금 높인 후, 이젤 앞에 자리 잡고 앉아 훤을 바라보았다.
“으. 쑥스러워.”
와인 때문에 살짝 붉어진 훤의 얼굴이 채도 높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럴 수 있어. 그렇지만 지금 예뻐.”
“멋있는 것도 아니고.”
훤이 고개를 숙이려다 말고 아운을 바라봤다.
“사자는 멋있고 강아지는 예쁜데 넌 강아지에 가까워. 사자처럼 어딘가 다가가기 어렵고, 좀 무섭기도 하고, 말 걸면 무시당할지도 모르는, 그런 느낌이 아니야. 물론 넌 대형견 느낌.”
아운은 선을 그으며 답했다.
“넌 그럼 뭔데?”
“나는...... 이구아나. 개보다는 고양이에 가까운데,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오진 않아. 다만 곁을 주면 알아서 찾아가지. 멍 때리기 천재기도 하고.”
훤은 소리 내 웃었다. 말을 하면서도 아운의 눈은 훤과 캔버스 사이를 바삐 오갔다. 대략적인 윤곽 작업이 끝나면 표정을 그리기 위해 침묵이 필요했으므로 대화를 나누려면 지금이었다.
“넌, 일은 어때?”
“나야 아직 팀 막내기도 해서. 잡다한 게 진짜 많고... 콘티 작화를 많이 하는데, 왜 우리 영화 수업 들을 때 본 콘티들 있잖아. 그런 걸 내가 그려. 근데 수정이 너무 많아서 저번엔 버전 28까지 하다가 나중엔 그냥 계속 최종, 최최종, 최최최종 이런 식으로 저장했잖아. 소심한 반항이었는데 아무도 모르더라. 어, 잠시만.”
후드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훤이 복도로 향했다.
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운은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창가로 다가가 거리를 내려다보니 금요일의 취객들이 여기저기 무리 지어 다음 장소로 이동 중이거나, 가게 앞에 동그랗게 모여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노래방의 요란한 줄무늬 네온사인이 규칙적으로 번쩍였다. 그때 쏜살같이 달리는 구급차 한 대가 지나갔는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자 훤의 통화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