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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자 농부 Oct 19. 2021

틈 2화

대화가 지루해진 아운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스케치한다.

“수정이는 결혼할 때 대출 풀로 당겨서 산 집이 몇 억 올랐대.”


아운에겐 이름도 가물가물한 선배의 말이었다.


“좋겠다. 우리도 내년 3월에 만기 돌아오는데, 전세보증금이 2천이나 올랐어. 게다가 와이프 직장은 여의도고 난 잠실이니까... 출퇴근 시간 형평성을 따지다 보면, 꼭 비싼 동네만 남거든. 어렵다. 어려워.”


한 학번 후배지만 동갑인 병준의 한풀이였다. 친한 친구들이 모두 못 올 줄 알았더라 자신도 오지 않았으리라 아운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휴대폰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8시 41분. 대충 10시 반쯤 일어나면 되겠다는 계산을 하고 나니, 떠다니는 대화가 더 재미없게 느껴졌다.


의미 없는 낱말들 사이로 그녀는 보통의 얼굴들을 뜯어보았다. 땅콩을 손에 몇 개 쥐고 말할 타이밍을 엿보는 초조한 눈동자, 장단을 맞춰주려고 웃는 입술과 입 주변의 떨리는 근육, 입 한번 떼지 않고 듣기만 하는 고개 숙인 얼굴의 턱 선에 눈길이 얼마간 머물렀다. 아운에겐 화자보단 청자의 얼굴이 늘 더 재밌었다. 듣는 사람은 꽤나 솔직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기 이훤. 광고회사에 다닌다고 했던가. 머리를 길러 대충 귀에 꽂아둔 모습이 잘 어울리네. 아운은 스케치북 앱을 켜며 생각했다. 친절하지만 자세히 보면 눈빛이 건조한 훤은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훤과 친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훤 쪽에선 그 누구도 친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아운은 오래전부터 추측했다.


“남자한테 예쁘다고 하는 거. 좀 어색해.”


“왜? 고양이나 꽃, 구름이나 남자나. 예쁘면 예쁜 거지.”


1학년 때 훤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운은 빠르게 훤의 눈과 그 아래 걸린 다크 서클, 긴 속눈썹을 그렸다. 오른쪽 눈이 조금 충혈되어 눈동자를 주변으로 분홍색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돋아나 있었다.   

“와, 이 언니 조용히 뭐하나 했더니!”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아운이 늘 거리감을 느꼈던 다미가 아이패드를 낚아채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았다.


오오오, 훤이지? 느낌 있네.”


병준이 화면을 훤 쪽으로 기울였다. 훤이 슬쩍 그림을 보더니, 쑥스러운 듯 웃었다. 


청약통장 가입은 빠를수록 좋고, 요즘 같은 저이자 시대에 월세 사는 건 바보짓이다. 전세대출을 알아봐라. 도운이 진리라도 설파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야야, 결국 이직의 최종 목적지는 대기업이야. 병준이 다미에게 조언을 하자, 누가 몰라서 안 해요? 다미가 중얼거렸다. 아운은 라디오를 켜 둔 듯 돌고도는 대화를 배경으로 생맥주를 홀짝이며 선을 긋고 또 그었다. 선들은 모여 병준의 턱을 괸 왼손이 되었고, 훤의 감긴 눈꺼풀이 되었다. 자정 무렵, 겨울 거리로 나온 무리는 각자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으로 흩어졌다. 훤과 아운은 같은 방향의 9호선을 탔는데, 덕분에 달큰하게 오른 취기와 얼음장 같은 찬 공기가 만드는 화학작용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훤, 부탁 하나만. 초상화 모델해주라.”


남색 머플러에 얼굴을 파묻으며 아운이 입을 뗐다.


“음... 그래.”


“주말에 시간 되나?”


언제나 대답이 반 박자 느린 훤이 긴 코트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으며 답했다.


“금요일 저녁은 어때?”




그림: tae-hope https://www.instagram.com/barista_pa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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