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에

그날의 로드무비

by 새벽종 종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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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날 어디든 좀 갈까요?

네? 네에, 그래요.

원래는 중국 가는 일에 이제 마침표를 찍었다는 소식을 알리고자 한 전화였다.

그런데 며칠 후에 만나자고 해서, 지인 K가 중국 생활 10년을 종식하려는 내 결정과, 어쩔 수 없이 몰려오는 시원섭섭한 심정을 위로해주고자 함인가 싶어, 네, 만나요.라고 바로 응답한 건데, 곧바로 이어서 제안하길 어디든 가자는 건 좀 의아했다.

어느새 나와의 여행까지 계획한다는 뜻인가?

그래도 알았다고 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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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상하게 강원도에 끌린다고 했다.

강원도에 다녀오는 건 어떨까요? 이 시간에 출발하면 저녁에 돌아올 수 있어요.

어머나, 정말요?

강원도라니!

차를 몰고 다닌데도 기껏 서울 교외겠지, 어렴풋이 그 정도만 짐작했기에, 강원도라니, 속으로 몇 번이고 반문하며 놀랐다.

그것도 무박으로, 오늘 안에 가능한가,

오전 10시 반, 잠실역 롯데백화점 앞에서, 이것 참 의외인데!

그러나 내 대답은 그리 망설임 없이 나왔다.

좋아요, 동해바다!

그녀의 운전 실력은 믿을 만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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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기 머금은 잿빛 대기.

멀리 녹음진 산이 겹치며 살금 색을 입힌 수묵화가 드넓게 펼쳐진다.

맞아, 초여름에 물기 어린 날씨에 대자연의 풍경은 정말 보기 좋아.


그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어느 해 5월의 일요일. 나는 그날 한 소년의 엉뚱함으로 곤경에 몰린 아가씨 국어교사였고, 택시 차창으로는 빗줄기가 풀리며 신록이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늘 죽음을 생각합니다.

소년이 보낸 편지의 우울함에 전염되어

망연한 얼굴로 빗발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저 슬프기만 했다.

대신 맞아준 총알처럼 아프고 텅 비고...


아득한 기분에서 빠져나오며 새삼스레 깨닫는 사실은, 그렇게 미묘한 공감으로 슬펐던 아가씨 때도, 치유와 충전을 동시에 감행했던 한 시기를 마감하는 지금 이 순간도, 대자연은 나 보란 듯 최고의 화가가 되어 내 앞에 대작을 펼쳐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눈 앞이 한 폭의 동양화예요!


일기예보는 하루 종일 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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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이 로드무비를 찍을까요?

해안가 주차장에서부터 나는 설레고 있다. 마치 첫장면을 열듯이, 지인을 인터뷰한다.

강원도에 끌리는 이유를 말해줄 수 있나요?

웃기만 하는 그녀.

낙산해변, 입구엔 갈매기 꼬리일까 싶은 기념탑이 서 있었다. 홍상수 감독이라면 이런 곳에서 뭐든 이야기를 끌어낼 것이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좋아해요.

우리는 홍상수 감독에 대해 잠깐 얘길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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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절대 안 찍겠다는 K.

그럼 발만 찍어요.

백사장에 나란히 누운 채, 한 발씩 올리자 했다.

아침에 노란 줄무늬 양말을 신길 잘했지.

두 개의 발이 하늘로 쳐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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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게 될 것 같아요. 책을 또 버리면...

중국 아파트를 비우는 문제로 하여, 책상자 이미지가 머릿속에 빙빙 맴돌고 있다.


책은 무겁고 그만큼 우송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래서 쉽게 답이 안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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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에 오르면서부터 비가 내렸다.

그래도 우산을 쓰고 걸을 만해서 다행이었다.

걷는 내내 나의 시야 속으로 다가오는, 숲도 정원도, 발길 아래 흙모래 바닥도 비에 젖은 채 더없이 사랑스럽다.

해변 홍련암 쪽으로 걸어가는 산책로, 키 큰 소나무들 아래 바람에 나부끼는 연둣빛 소망 리본들,

로또에 당첨되게 해 주세요.ㅡ소망이 참 장난스럽다.


홍련암에 들렀다가 의상대에 올랐다.

바다와 바람, 그리고 빗방울들...

잿빛 바다, 옛날의 빗금 하나 거기 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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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한 여자는 한국을 떠나며 책장 두 개를 남기게 됩니다.

또 한 여자는 떠나는 여자의 책장 두 개를 무슨 소중한 보물이나처럼 자신의 집에 받아놓았습니다.


호기롭게 외국으로 떠나 공부를 시작한 여자는 예상한 이상의 중압감에 짓눌려 언제고 부서지고 말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친구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돌아올 때까지 책장을 잘 보관하고 있을게요.


아아, 견딜 수 없어.

남아 있는 여자는 책장을 보며 생각합니다.

삶이 조금도 생생하지 않아 숨이 막힙니다.

그러나, 내가 이대로 사라지면 저 책장은 어찌 하나. 잘 보관해 주겠노라 철썩 같이 약속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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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귀한 책이 꽂혀있는 책장도 아니었다.

이웃이 내다 버린 어린이 영어교재며 아동용 책들까지...

그것이면 아이의 한때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 열심히 주워다 놓은, 그래서 더욱 잡다하고 더욱 간절해진 여자의 책장.

그런 책장을 두고 한 여자는 마음의 빚을 크게 졌고, 또 한 여자는 성의를 다해 약속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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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터널이 이어진 길을 택했다.

터널 하나를 벗어나면 금세 다른 터널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면 또 터널이....


그래요, 우리 이렇게 산 넘고 물 건너 앞을 향해 달리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