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 세계의 색깔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강] - '타자는 나를 구성하는 색' 대화 해설

by 지연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이성을 사랑하는 열병을 앓게됩니다. 이 시기에는 그 사람이 마치 천사처럼 보이고 말, 행동, 외모, 배경 모든 것이 아름다워 감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지요. 그런데 오랜동안 그 또는 그녀를 깊이 사랑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껍질이 벗겨지며 '실체'와 '현실'이 드러나 몹시 실망하는 시점도 오고야 맙니다. 내가 사랑했던 그이가 지금 이 비겁한 사람이 맞나 눈을 씻고 아무리 비벼봐도 예전의 그 천사는 승천해버리고 돌아오지 않아요.


저는 이 현상을 '타자'의 핵심으로 보았습니다. 고유한 빛과 색깔이 내 세계 전체의 한겹을 특정하고 물들이는 현상 말입니다. 타자는 나 자체를 구성하지만, 사라질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젤다와의 대화에서 밝힌 것처럼, 저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이 빛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마치 거대한 능력을 하나 잃은 듯, 어떤 실연보다도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전 온 인류가 사라지면 이 세상이 물리적으로도 암흑이 되는게 아닌가 하는 SF적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멸망의 이미지는 어두운 하늘이 필수죠. 이게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을 예시로 들어서 그렇지, 내가 가진 물건들도 그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존재감을 뽐냅니다.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는게 실연의 상처와 맞먹을 때도 있어요. 또, 어떤 물건의 스타일을 소유하면서 내 존재감이 고양되기도 하죠. 애플 제품이나 명품의 임팩트를 예시로 드는 건 이제 식상할 정도입니다. 팝업 스토어나 호텔처럼 기획된 공간에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제것으로 만들도록 제안하는 스타일과 색이 있습니다.


젤다는 제게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서부터 타자인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제게 '보라색'이 무엇인지 묻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내가 빨강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파랑이면, 우리의 공간은 보라색이죠. 그러니 그게 있다고는 표현할 수 있지만 명확히 경계를 지을 수는 없었어요. 만약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고, 내 세계가 갑자기 보라색이 아니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전 아마도 오랫동안 제가 빨강이 아니라 보라에 가깝다고 생각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반에는 몹시 당황하겠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보면 제가 더이상 예전의 그 빨강도 아니라는 것 또한 깨닫게 되겠죠.


정말 의도하고 기획했던 게 아닌데도, 젤다와의 모든 존재론은 파동, 스펙트럼, 빛으로 수렴되고 있습니다. 신기한 일이에요. 빛은 사라져도 흔적을 남깁니다. 사진은 빛의 화학적 흔적이죠. 물리학에서는 빛이 지나간 자리에 간섭무늬와 운동같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의 사진으로 나이를 측정할 수 있어요. 빛은 피부의 세포 구조도 변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변합니다. 저와 젤다가 여기에 흔적을 남기며 여러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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