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났지만 없었던 일

-어떤 민원-

by 강지영

초등학교 2학년 <봄> 교과서가 있다. 예체능 교과를 통합하여 계절에 맞게 '봄'이라는 교과서명을 붙였다. 1단원은 '알쏭달쏭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중에 나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는 '성장흐름표 만들기' 수업준비 과정에서 일이 벌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네댓 가지의 사진을 가져오는 것인데, 아무래도 학부모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사진을 인화하지 않고, 휴대폰에 담아두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진 가져오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수업 3일 전쯤에 학부모에게 단체 문자를 보냈다. 교과서의 예시 사진도 찍어서 나름대로 친절히 안내했다.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고 마음 놓고 있었다.


마침내 성장흐름표 수업이 있는 날, 아침부터 아이들이 자기 사진을 꺼내 놓고 난리다. 특히 엄마 젖을 먹고 있거나 젖병을 입에 물고 있는 사진, 목욕하는 아기 모습, 보행기 타며 해맑게 웃는 얼굴 등을 보여주며 저희들끼리 키득거린다. 아침 시간은 독서시간으로 정해 놓았건만 그날은 독서 말고 사진 감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내가 보아도 모두들 귀여운 어린 아기 모습이었다. 잠시 우리 두 딸의 유아기 시절이 떠올라 웃음 지었다. 그래도 옆반에 방해될까 봐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도 젖살이 남아 있는 아홉살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이렇게 많이 맘껏 볼 수 있음은 교사의 행운이다.


나의 즐거운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교실 전화가 울렸다. 한 학부모의 전화였다. 사진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학교에 보냈다고 하였다. 나는 괜찮다고 하였다. 그리면 되니까. 그런데 학부모는 아이의 사진을 학급알림방에 올렸으니 출력해서 자녀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순간, 당황되었다. 이런 전화는 처음이라서. 처음은 누구나 낯설다. 황당한 마음에 얼른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수업 시간이 15분쯤 전이었다.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위층에 있는 학년 연구실로 갔다. 칼라프린트를 하기 위해서다. 교실 프린터는 칼라 출력이 안된다.


연구실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 하이클래스에 접속했다. 사진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교실로 왔다. 내가 없는 사이에 아이들은 즐거움이 넘쳐서 자유를 찾아 방황중이었다. 아이들을 제자리에 앉혔다. 학부모의 전화번호를 찾아 수화기를 들었다. 하이클래스 화면을 보면서 어디에 사진을 올렸는지 물었다.

"ooo 어머니, 사진이 안 보이네요. 어디에 올리셨죠? 잠시만요. (전화기를 막고) 얘들아, 조용히 해 봐. 선생님이 전화 중이잖아. 조금만 조용히 해 주었으면 좋겠어. (다시 전화기를 들고), 잠시만요. 지금 찾는 중인데... "

"하이톡에 올렸어요."

"잠시만요. 아하, 찾았어요. 여기 있군요."

ooo의 사진 몇 장이 눈에 띈다.

"ooo어머니, 오늘은 처음이라 제가 출력하긴 하는데, 다음부터는 이렇게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교실이 너무 바쁘거든요. 수업 준비도 해야 하고요."

"네? 교실에서 프린트가 안 되나요?"

"네, 교실에서는 칼라 프린트가 안된답니다. 아이들만 놔두고 다른 곳에 가서 출력해야 해요. 미리 안내드렸는데, 미리 준비해서 보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나는 좋은 감정은 아니었지만 최대한의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에도 차고 건조한 꽃샘추위 같은 목소리가 나의 온몸을 떨게 했다. 학부모의 격앙된 목소리다.

"아니, 오죽하면 그랬겠어요. 담임 선생님이 그 정도도 못해주나요?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나는 더 이상 학부모와 통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머릿속의 생각이 말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저, 학부모님, 출력해서 줄게요. 이제 전화 끊겠습니다."

"......"

"수업 시작이 되어서요. 전화 끊겠습니다. 네, 전화 끊겠습니다. 네~"

"......"


전화를 끊겠다는 내 말에 학부모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렇게 전화를 끊고 수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도저히 수업이 되지 않았다.

"얘들아, 선생님이 급하게 할 일이 있으니까, 잠시 동안만 독서를 하고 있을래?"

아이들은 각자 책을 꺼내 들고 내 눈치를 살피느라 조용했다. 40분 동안에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왜 나는 이렇게 소심할까. 어차피 출력해 줄 거면서 기분 좋게 대담하게 해 주면 될 것을. 심호흡을 했다. 효과가 없었다. 연구실로 가서 온수와 냉수를 섞어 따뜻한 물을 마셨다. 조금 진정되는 듯했는데, 그래도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선배 교사를 찾아갔다. 선배 교사는 청귤차를 타주면서 토닥여 주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평온을 되찾아 2교시 수업을 하려고 할 때였다. 교감 선생님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나는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흥분되었다. 학부모는 자신의 분노를 교감 선생님께 토로한 모양이다. 교감 선생님은 파일을 보내라고 교무실에서 출력해 주겠노라 하였다. 괜찮다고 하였다. 교감 선생님은 그걸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고 하였다. 걱정 마시라고 하였다. 더 이상 문제 삼을 게 뭐가 있겠는가. 내가 조금만 마음의 여유가 있었어도, 학부모가 조금만 바쁘지 않았어도, 교실에 칼라프린터만 있었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성장흐름표 만드는 수업 시간, 아이들이 신이 났다. 어떻게 수업을 마무리할까 생각하다가,

"여러분, 성장흐름표를 만들어 보니까 어떤 생각이 드나요?"

곧바로 내가 의도한 얘기를 하는 학생이 나온다.

"부모님이 나를 키우기 위해 애쓰신 걸 알았어요."

"오호, 그랬구나. 그럼, 그 마음을 담아 글로 써 보는 건 어때요? 자, 우리, 편지를 씁시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편지 쓸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한 아이가 사진을 옆에 놓고, 편지지를 보더니,

"선생님, 눈물이 나려고 해요."

하면서 울먹인다. 나는 그 여학생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홉 살 아이가 자신의 성장과정을 되돌아보고 부모님께 편지를 쓰려다가 눈물이 나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인가. 그 아이의 눈물에 내 마음도 정화되었다. 그래, 어른들보다 네들이 낫다.


닷새 후, 학부모 상담 전화를 하는 시간. 나와 학부모 두 사람 다 그 '사진 사건'에 대한 언급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일어났지만 아무 일도 없던 일이 되었다.




keyword
이전 11화혼잣말로 욕하는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