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화장실 다녀와도 돼요?"
"선생님, 점심시간에 나가 놀아도 돼요?"
"선생님, 사인펜으로 색칠해도 돼요?"
"선생님, 색연필로 색칠해도 돼요?"
모두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이다. 이 일들은 허락을 받을 일이 아니라고 여러 번 말을 했는데도 매번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위처럼 묻는다.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기본적인 일부터 학습의 전반적인 일까지 모두 허락을 받는 아이들이다. 무엇보다도 화장실 다녀와도 되냐는 물음은 너무나 이상하다. 화장실 가지 못할 상황이 어디 있다고, 이런 일까지 묻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나 아이들의 활동을 제한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의 생활을 엄격하게 규제나 간섭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일일이 허락을 받는 투의 말이 거슬렸다. 그리하여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얘들아, 선생님께 허락을 받으려고 묻기보다는, 너희들의 마음을 나에게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
"예를 들면 말이지. 화장실 다녀오고 싶어서 화장실 다녀와도 되냐고 묻는 거잖아.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선생님, 화장실 다녀오고 싶어요. 아니면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와 같이 말하도록 하자. 그리고 사인펜으로 색칠하고 싶으면, 사인펜으로 색칠해도 되냐고 묻지 않는 거야. 그 대신, 선생님, 사인펜으로 색칠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자는 거지. 너희들의 마음이나 바람을 나에게 말해 줘."
나는 학생들이 좀 더 자율적으로 살기를 바랐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색칠하는 게 색연필과 사인펜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레파스도 있긴 하지만 아이들은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크레파스 '똥'이 많이 생기니까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무슨 좋은 채색도구가 없을까, 하고 연수실을 뒤져보았더니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파스텔 열 세트 가량이 눈에 띄었다. 아이쿠, 이렇게 좋을 때가 있나. 나는 단숨에 그걸 챙겨 왔다. 예전에 나는 파스텔화를 몇 번 보긴 했고 그려보긴 했지만, 아이들에게 가르치려니 자신이 없었다. 방과 후에 네이버와 유튜브를 검색해서 몇 개의 자료를 찾았다. 나도 따라 그려보았다.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다음 날, 아이들에게 파스텔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파스텔은 가루 원료를 반죽하여 굳힌 것이라는 것, 스케치는 연필로 하지 말고 파스텔로 하라는 것, 손가락으로 문질러 표현한다는 것, 두 가지 이상 색깔로 그라데이션 효과 내는 법 등을 설명하니 아이들이 그리고 싶어서 안달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종이에 채색된 파스텔은 지우개로 지워진다는 것. 우선 A4복사지를 나눠 주고 모둠별로 파스텔을 배부했다. 주제는 자유롭게 하자고 했다. 아이들이 참 재미있어하였다. 어떤 아이는 얼굴에 파스텔로 범벅을 했다. 피부가 걱정되었다.
"나니(가명)야, 종이에 그려야지, 넌 왜 얼굴에 그린다냐. 아이고, 어서 가서 씻고 와."
"나니, 얼굴 좀 봐. 헤헤헤."
여기저기서 나니의 얼굴을 보고 웃는다. 그 웃음에 동참하지 않고 열심히 자기의 그림에만 집중하던 박신기(가명)가 묻는다.
"선생님, 파스텔을 어디서 사요?"
"문구점에서 사지."
"선생님, 비싸요?"
"글쎄... 사고 싶어? 파스텔이 맘에 드는구나?"
"네. 사고 싶어요."
"그래? 열심히 그려서 부모님께 보여드려 봐. 그림이 좋으면 부모님을 설득하기가 더 좋겠지?"
색연필과 사인펜으로 색칠할 때는 대충대충 그리던 신기였는데, 파스텔을 처음 접한 신기는 돌변하였다. 박신기는 '바다'를 그렸다. 얼마나 신통방통했는지, 나는 파스텔을 신기에게 주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 눈치가 보여서 그러지는 못했다. 나중에 신기에게 한 번 물어보고 부모님이 사주지 않았다면, 신기에게 한 세트 주어야겠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파스텔화는 '머메이드지'라는 종이에 그리면 좋은 표현효과를 볼 수 있단다. 머메이드는 영어로 'mermaid'라고 쓰는데, 네이버를 찾아보니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자 모습의) 인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머메이드지 재질에 나타나는 약간의 요철이 물고기의 비늘을 연상시킨다. 이름을 알고 나니, 더욱 재미있다. 문구점에 가서 머메이드지와 정착액을 샀다. 파스텔은 종이에 닿으면서 가루로써 채색되기 때문에 스프레이 형태로 된 '정착액'을 뿌려주면 작품의 보존에 유익하다.
내가 미리 찾아보고 그려보고, 아이들에게 가르친 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잘 따라와 주어서 고맙다. 특히, 신기가 파스텔의 그라데이션 효과를 제대로 살리는 그림, 바다를 그린 것이 좋았다. 나는 바다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신기가 그걸 떠올려 그린 것이 기특했다. 갈매기 날아가는 것까지 그려놓으니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은 것이다. 참 신바람 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