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익숙한 낡은 집을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 지어진 집은 엉성하지만 두려운 기억을 제법 잘 살려냈다.
다갈색 벽돌 사이,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시멘트 위를 기어 다니는 붉은 벌레는 특히나 꿈과 현실의 경계를 잘 허물었다. 붉은 벽돌 진드기들이 점령한 외각의 내부는 불투명한 현관문을 통해 여실히 내비친다.
나는 선명한 추억에 겁을 먹어 버렸다. 터무니없이 잘 구현된 [익숙한 집]은 무의식 속에서도 고개를 도리질 치며 뒷걸음치게 만든다. 작은 발에 신겨진 운동화는 잘못 뛰면 금방 벗겨질 정도로 사이즈가 컸다. 동네에 버려진 운동화를 주워 신은 탓이었다.
다가구 주택 2층에 자리 잡은 [익숙한 집]에서 도망치기 위해 헐렁한 운동화를 질질 끌며 계란을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한 칸, 한 칸. 신중한 발걸음 탓에 시간이 늦어진다.
[익숙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불안은 가중된다.
뜻대로 빨리 움직이는 몸과 달리 속은 정신을 고스란히 따라가 목구멍까지 위액이 울렁거리는 듯하다.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위액과 함께 공포가 범람하려는 찰나, 내 불행의 근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누렇게 변한 흰색 티셔츠를 입은 고수머리의 사내였다. 깎지 않은 수염 자국이 턱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지저분한 남자.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틀대는 인간의 손에는 역시나 초록색 병이 들려 있었다. 반절 조금 못하게 남은 액체가 소주병 안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그의 움직임에 맞춰 출렁댄다.
잘 짜인 각본처럼 계단의 한 가운데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붉게 충혈 흰자가 어두운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깊게 각인된 공포가 떠오르자 온몸이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너…,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성난 아버지의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풀어도 풀리지 않는 분노는 늘 그에게 내포되어 있었다. 나와는 달리 성큼성큼 큰 걸음걸이로 사내가 다가온다. 살고 싶다는 생존본능이 굳은 내 몸을 일깨웠다. 그제야 바쁘게 발걸음을 놀려 계단을 두 개, 세 개씩 뛰어 올라가 보지만 금세 따라잡힌다.
오른쪽 어깨를 그의 누런 손이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고통이 올라와 눈을 찌푸렸다.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소용은 없다.
“도망갈 땐 언제고 이 집에 다시 기어들어 와! 감히 내 말을 어기고 우습게 봤지.”
아버지의 남은 손 하나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칼을 목에 들이밀었다. 예리한 은색 날붙이가 햇볕에 반사돼 번쩍인다. 나는 그를 죽을힘을 다해 밀어낸다. 계단 난간에 걸쳐 있던 아버지의 몸이 균형을 순간적으로 잃고 기울어졌다.
그는 추락한다. 오래 자르지 않아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춤을 춘다. 낙하하는 체공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길다. 그가 세상의 모든 비난을 쏟아 냈다. 분노는 한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눈빛을 외면하지 않았다.
사실은 가장 바랐던 시간이기도 했다. 나를 괴롭혔던 근본을 겨우 내 손으로 없앴다는 통쾌함은 비윤리적 행동을 자행했다는 죄책감과 뒤섞여 눈물을 토해내게 만든다.
오랜 시간에 걸쳐 겨우 추락한 아버지를 나는 난간에 배를 걸치고 고개를 빼내어 내려다봤다. 사내는 신음을 흘린다. 그리곤 피 한 방울 없이 다시 몸을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가만두지 않을 테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대사와 함께 아버지가 다시 계단을 오르며 나를 위협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와 맞설 것을 결심하며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와 맞서지 않으면 끝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평생을 거쳐도 헤어 나오지 못할 원망과 공포를 무력감과 함께 실감하는 순간 나는 비현실적 세계의 탈출을 깨달으며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