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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연구한다고? 누가?

어느 연구자의 변명

by second half


번역을 연구한다고? 아마 대부분 번역학이라고 하면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번역을 하는 사람들을 실무자라고 한다면, 번역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향, 최은실, 조혜진(2017)에 따르면 번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 85%가 여성이며, 77%가 실무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 연구자의 32.5%가 번역학 박사 학위 소지자라고 한다.1) 번역을 하는 사람들 중 여성의 비율이 높으니 당연할 수도 있겠다.


실무에 종사하다 번역학 박사를 취득한 여성인 나는 매우 일반적인 번역학 연구자에 해당하는 한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와 같은 연구자 상당수는 다양한 전공으로 학부 과정을 마친 뒤 통번역 실무를 다루는 전문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실무를 하다 박사과정에 진학하면서 연구에 입문한 사람들이다.


물론 석사 취득 후 곧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연구에 입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정 기간 실무에 종사하다가 박사 과정에 입문하게 된다. 필자를 포함한 현재 번역학 연구자 중 상당수가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나와 같은 연구자들은 몇 가지 특별한 어려움을 겪는다.


첫째, 이들은 초심 연구자이다. 누구나 그렇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좀 다르다. 전문대학원인 통역번역대학원의 교육과정은 철저히 실무에 맞추어져 있다. 졸업 요건에 석사논문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각종 분야에 대해서 모국어 방향 또는 외국어 방향으로 수업이 세분화되어 있고, 졸업 시기가 되면 각 과목의 실무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졸업장을 받게 된다. 불합격한 과목은 다음 학기에 재응시한다. 석사학위를 취득하기는 하지만 논문이나 연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훈련을 거친다. 석사 과정에서는 논문 한 편 읽어 본 기억이 없고, 물론 학회 같은 곳은 가 본 적도 없다.


내가 박사과정 첫 학기에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연구주제에 대한 고민이나 학업 자체의 어려움이 아니라 수업자료와 참고문헌의 정체를 파악하고 도서관에서 자료 찾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학위논문, 단행본의 챕터, 학술논문 등 문헌 종류의 차이를 비로소 알게된 것도, 도서관 DB에서 필요한 문헌을 검색하는 법을 어느 정도 익힌 것도 첫 학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박사과정 동료들 모두 나와 같은 처지였기에, 누가 누구를 도울 것도 없었다. 논문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연구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코스웍이 시작되고 꽤 지났을 무렵이었다.


둘째, 번역학자들은 대부분 실무자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실무를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것이 “학문”의 하나임을 알게 되고, 내가 종사하는 실무가 연구 자료가 될 수 있다는 막연한 마음으로 박사과정에 진학한다. 물론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박사과정에 오면 어떠한 일을 겪게 될지 모두 탐색하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소양도 쌓고 입학하는 훌륭한 선후배, 동기들도 존재하니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무지몽매함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준비가 된 사람이든 안된 사람이든 종사해오던 통번역 실무를 접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실무는 여태까지 해오던 것이고, 연구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되는 힘든 일이다. 자연히 내가 해오던 일, 적지 않은 보수가 주어지는 일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


게다가 팍팍한 인문학에 속하는 번역학 박사과정생에게는 뚜렷한 수익구조가 없다.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도 그렇고, 그 후에 연구자로 자리잡는 데 걸릴 기나긴 시간 동안 나를 지탱해 줄 수입원을 끊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면 하기 힘들다. 그렇다보니 번역학 연구자들은 대부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무를 병행하면서 연구를 한다. 실무를 버리는 용단을 하지 않는 경우, 실무와 연구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진다. 다수의 연구자가 그 과정에서 연구를 놓고 실무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학위 취득이나 연구 성과 축적에 걸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어진다.


물론 일반대학원에도 번역학 석박사 과정이 개설되어 있기에, 석사과정에서부터 전업 연구자의 길을 걷는 번역학 연구자들도 있다. 다양한 번역학 연구자가 존재하는 것은 번역학의 저변이 조금이라도 넓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글은 그저, 실무와 연구 사이를 갈팡질팡 하느라 거북이처럼 더디게 연구 성과를 쌓아 올리고 있는 내 처지에 대한 핑계이자 변명이다. 오늘도 실무와 연구 사이를 저글링하며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갈팡질팡 고민하는 동료 연구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공감을 보낸다.



1) 이향, 최은실, 조혜진 (2017), "누가 번역학을 연구하는가? - 국내 번역학 연구자의 프로필 비교", 통역과 번역, 19(3), 11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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