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언어, 24개월
육아는 공부하면 할수록 굵은 선으로 진하게 그어진 ‘원칙’보다는 수채화 같은 마무리를 가진 ‘문화’인 것 같다. 부모의 가치관이나 생각, 마음가짐이 응축된 씨앗이 자라 집집마다 고유한 육아 방식이 생겨난다.
남편과 나는 스스로를 잃지 않는 선에서 되는 대로의 육아방식을 갖고 있지만 우리에게도 나름 꼭 지키는 것이 있다. 바로 ‘우주가 우리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을 표현하기‘다. 보통 안아주거나, 웃어주는 등의 바디랭귀지로 표현해주지만, 말로도 꼭 구체화하려는 편이다. 사랑은 아무래도 부정보다는 긍정의 단어와 이미지를 많이 안고 있어서인지, 우리가 하는 말은 대부분 기분 좋은 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우주도 “조아조아!”, “사람해!“, ”곰아워~“와 같은 표현을 더 빨리 배운 것 같다. 자신이 받은 것이 사랑뿐이라 줄 것도 사랑밖에 없는 사랑둥이 시절이었달까. 하지만 애정표현을 자유자재로 할 즈음 우주는 부정하고 거절하는 언어 또한 배우기 시작했다. 부모의 시각으로 보면 우주의 작은 반항기가 시작이 된 것이다. 선택지를 주면 “그거 아냐! “라고 소리친다든지, 뭘 하려고 하면 ”치러(싫어!) “라고 입술을 내민다든지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작은 인간의 심통이 나름대로 귀여웠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고, 떼쟁이가 된 우주가 꽤나 낯설고 까다롭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다투는 것만큼 내게 스트레스를 주는 요소가 없었던 것 같다. 갈등이 있으면 나 스스로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아무리 기이하더라도 상대의 세계를 꼬집고 비판하기 어려워하는 특유의 고요한 자기 파괴적 특성 때문인지 나는 갈등이 두려웠고 말싸움은 최대한 피하는 쪽이었다.
이런 성향을 바탕에 두고 있는 나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그런 잡음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만든 세계를 스스로 깨고, 내가 믿고 있는 명제들을 고쳐나가는 일은 대부분 힘든 일을 직면하거나 나와 다른 사람과 부딪혔을 때 일어나곤 했으니까.
그러니 우주의 “치러!”와 “이거 아냐!”는 우주의 영역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고, 그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겠지. 키우는 난이도는 높아졌지만 우주가 엄빠를 반대할 만큼 컸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학창 시절부터 좋아했던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의 자서전에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문구가 있다.
‘자유란 일부에게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겠지만
대부분에게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주는 그렇게 좀 더 자유로운 아기에 가까워졌구나, 생각하니 귀엽고 응원하게 된다.
우주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시인 같은 내 친구가 말했다.
“이렇게 작은 아기가 너에게는 세계겠지,
건강하게 잘 컸으면 좋겠다.”
우주의 세계가 커진 것은 나의 세계도 커진 걸 거다. 일석이조! 엄마가 조금 힘들긴 하지만 우주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