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언어, 25개월
가족, 친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정보육을 하는 이른바 섬육아는 생각보다도 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도 엄마이기 이전에 사람인지라 감당이 안 될 것 같으면 친정으로 일주일정도 도망치곤 했더랬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밥만 먹어도 힘이 났고. 우주가 자는 동안 동생이랑 같은 취향의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치유됐다. 결혼하고 독립한 지 5년이 더 되었지만, 친정에 가면 바뀐 것보다는 익숙한 것이 더 많이 보인다. 오랜 시간 함께 해 생활양식과 취향,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편안함. 이런 곳이 사람들이 말하는 고향인가 싶다.
코로나 베이비여서도 있겠지만, 우주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는 친정에 가도 방콕을 하곤 했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게 짐도 많고 체력도 달리는 일이라 사실 그저 쉬고 싶은 날이 더 많았다. 우주가 크면서 짐도 줄어들고 스스로 걷고, 또 무엇보다 자기표현을 하게 되면서부터 엄마와 나, 우주 이렇게 3대 외출을 도전하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엄마가 이런 날은 종묘가 아름답다고 하시며 우주랑 같이 가보자고 하셨다. 아이와의 외출에서는 웬만하면 택시를 타곤 했지만, 그날은 눈 때문에 여간 잡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우주 인생 처음으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우주가 지나가는 버스만 보면 타고 싶다고 하기도 했으니까. 아이와의 대중교통 탐험(?)에 대한 후기는 친구들로부터 이미 많이 들었던 터라, 혹시라도 울거나 넘어지거나 하는 일이 있을까 봐 나름 긴장했는데, 웬걸 우주는 아주 다소곳하게 앉아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아마 낯선 버스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있는 것이 우주도 긴장이 되었나 보다. 우주를 안심시키는 말을 해주고 창 밖의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종묘에 다다랐다.
추운 날씨 탓인지 아이를 데리고 온 팀은 우리뿐이었다. 혹시라도 집중에 방해가 될까 봐 대여 유모차를 끌고 가이드 분을 둘러싼 무리보다 한참 뒤에 떨어져 천천히 구경했다. 사실 우리 문화유산을 우주에게 처음 보여주는 것이라 한껏 기대에 부풀었는데 역시나 우리 집 꼬마는 눈에만 관심이 있었다. 눈을 만지고 누군가 만든 눈사람과 인사하고, 할머니랑 눈싸움을 하는 것이 우주는 더 좋았다. 그런데 눈과 울 엄마, 울 딸의 모습이 아름다웠던 것과는 별개로 종묘를 한 바퀴 돌자 내 체력이 바닥이 났다. 유모차를 잘 타지 않는 딸 덕에 안고 업고를 중간중간 반복해야 했기 때문.
나름 결의를 다지고 나온 외출인데 나온 지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집을 가고 싶다니. 딸이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엄마는 내가 오래간만에 친정에 온 것이기에 콧바람을 더 쐬어주고 싶으셨다. 종묘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익선동이니까 익선동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가는 게 어떨지 내게 물으셨다. 사실 내 상태는 택시가 보이면 바로 집에 갈 기세였는데 택시가 보이지 않아 정말 어쩌다 보니 익선동에 도착했다. 익선동은 여전히 볼거리가 많았다. 작은 골목골목에 개성이 반짝이는 가게들이 많아서 힘든 건 잊고 오히려 우주에게 설명해 주느라 바빴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르불란서'가 보여 즉흥적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 레스토랑은 익선동에 올 때마다 간판만 몇 번 봤던 곳인데 이상하게 들어가진 않았던 곳이다. 프랑스어를 부전공했음에도, 나름 여행도 두 번이나 갔었는데도, 프랑스 요리는 여전히 이국적이고 낯설었는지 항상 '다음에 가봐야지. 또 기회가 있겠지.'싶어 늘 지나 만 갔던 곳이었다. 그곳에 우주랑 엄마랑 가다니! 시간이 애매해서였는지 우리는 룸에서 먹을 수 있었고 힘든 것을 다 잊게 해 줄 만큼 맛있었다.
다 먹고 나와 집에 가려는데 길거리 붕어빵이 보였다.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가짜 말고 진짜 붕어빵 장사였다. 할아버지가 무심하게 붕어빵을 뒤집고 계셨는데, 배불러도 붕어빵은 못 참지. 모름지기 진정한 붕어빵이란 방금 만들어서 김이 나야 하고 팥이 첫입에도 들어있어야 한다. 그렇게 우주는 인생 처음으로 진정한 붕어빵을 먹었다. 우주는 운이 아주 좋았다. 첫 길거리 붕어빵이 엄마의 인생 붕어빵이었으니까. 다음에 또 갔을 때 꼭 그 자리에 계시기를 기도해 본다.
우주는 이 날 하루에 새로운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 나는 궁금해 물었다.
"우주야,
오늘 버스 탄 게 좋았어,
종묘에서 눈을 구경한 게 좋았어,
프랑스 요리를 먹은 게 좋았어,
아니면 붕어빵 먹은 게 좋았어?"
우주가 대답했다.
"나는 할머니가 조아떠!"
참으로 우문현답이 아닐 수 없다. 정말 네가 나보다 낫구나. 무엇을 경험하냐도 중요하지만 사실 누구와 경험하냐가 더 중요하단 것을 갓 두 돌 넘은 네가 깨달았구나.
나와 남편은 여행을 좋아하는데, 모든 여행이 최고의 상황 위에 있지는 않았다. 기본적인 검색을 하지 않고 가서 하필 우기에 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고, 기대해서 찾아갔는데 하필 그날만 쉬는 가게가 있기도 했다. 그런데도 돌이켜보면 좋지 않은 여행이 없었다.
해가 쨍쨍하면 그 장소의 모든 색깔이 요동쳐 아름답지만, 비가 와서 톤다운된 모습도 꽤나 정취 있다. 그리고 비가 가끔은 더 귀한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현지인도 40년 만에 본다는 이상기후를 경험했었다. 우중충하고 비가 쏟아졌는데 만나는 스페인 사람마다 “여기 날씨 원래 안 이래~ 너 다음에 또 와야겠다!”라고 덧붙이곤 할 정도였다. 그런데 덕분인지 몬세라트에 갔을 때 운무가 자욱하게 내려앉았었는데, 가이드도 처음 보는 광경이라고 하셨다. 그곳에 자주 오는 사람도 못 볼 웅장한 풍경을 보다니 정밀 오히려 좋군.
그렇다, 사실 여행에서도 내게 중요한 건 누구와 함께이냐이다. 어디를 가도 어떤 악조건이어도 “생각보다 좋은데? 우리가 운이 좋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라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오랜 시간이 걸려 물들어 진 것을 우주는 벌써 느꼈나 보다. 앞으로도 3대 모녀가 새로운 곳을 함께 가고, 다양한 경험을 함께 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