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언어, 25개월
우주가 내 뱃속에서 30주를 보냈을 무렵, 나는 일을 그만뒀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는 것은 내게 익숙했다. 열심히 맡은 바에 적응하고, 업무가 손에 익으면 나는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 가끔 진득함이라는 단어와는 꽤나 먼 나의 이력에 스스로도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지만, 내가 이렇게 생겨 먹었다는 걸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일이 너무 재밌고 배우는 것이 좋은 동시에 일이 내 인생에 그리 큰 부분은 아니라 생각했다.
일보다 세상에 정이 가는 것은 차고 넘쳤으니까. 책 읽기, 요가하기, 영화 보기, 여행 가기, 전시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기, 글쓰기. 나는 이런 것들을 하는 시간이 좋았고, 이들은 하나하나 모여 내 정체성이 되어줬다. 그런데 우주를 낳고서는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드는 것 자체가 난관이었다. ‘엄마’라는 역할이 나를 잠식하면서, ‘나‘는 희미해져만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일이 자연스럽게 고파졌다. 가장 빠르게 나를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역시 내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니까.
사실 내게 직업이 없는 건 아니다. 현재 나는 ‘주부’다. 주부의 직무는 단연 집안일이겠지만, 나처럼 가정보육을 하는 경우는 육아의 비중이 단연 크다. ‘가정보육하는 주부’는 어떻게 보면 나의 적성에 잘 맞는 일이었던 게, 좀만 적응하려 하면 아이가 또 커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늘 배워야 하고 지루할 틈은 절대 없는 일이랄까. 그래, 그 부분은 재밌었다. 하지만 집안일과 육아의 범위는 내 생각보다 다채롭고 세분화되어 있었다. 그렇게 아주 작고 다양하게 나누어진 일이라 그런지 해도 해도 티가 안 났다. 열심히 해봤자 현상 유지인 일을 반복해야 한다니, 작고 티 안나는 일에 마음과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니, 내가 동경하던 독립영화 주인공 같은 삶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또 하나의 변수는 역시나 사람이었다. 먼저 우주: 내 눈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기에 나를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이지만, 동시에 나를 매번 체력적인 한계에 내모는 존재. 개월 수가 차면서 속으로 ‘오늘도 할 수 있다!’를 몇 번 외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18개월을 넘길 무렵부터는 이제 곧 우주의 체력이 내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26개월까지는 꼼짝 못 하고 가정보육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이미 눈앞에 놓여있었으니. 그다음으로 남편: 육아에 손 발을 맞춰야 하는 우주의 부모 중 부. 하지만 분명 나름 열심히는 하는데 어쩐지 나보다 최소 한두 발 뒤에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 같은 코워커. 사실 아이 낳기 전에는 크게 싸울 일이 딱히 없었다. 한 생명체를 키워나가는 일이 어찌 쉽겠냐만, 우리의 관계도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이했다. 우주가 나의 체력적 한계를 느끼게 했다면, 남편은 나의 정신적 한계를 느끼게 했다. 그러니 2년 넘는 기간 동안 가정보육했던 주부는 한계의 폭발을 잊을만하면 맞이했다.
한계에 다다를 때 가장 빠르게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것은 역시나 ‘말’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우주는 그걸 너무나도 잘 아는 아이다. 이를테면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나의 뒤에는 항상 장난감 빗자루를 들고 따라다니는 우주가 있는데, 이 아이가 꼭 한 마디씩 던지는 게 아닌가. 이 작은 꼬마는 꼭 “엄마 갠쨔나여?”하며 내 상태를 확인한다든지, “엄마! 최고!!!”하며 칭찬의 말을 덧붙인다.
하루는 물티슈로 바닥에 생긴 크레용 자국을 지친 기색으로 닦고 있는데 우주가 창가에 있는 미끄럼틀 쪽에서 나를 다급히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해서 가보니 우주가 커튼이 쳐진 창문의 작은 틈을 가리키며 “엄마 눈이 마니 와!”하는 거다. 우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정말 포근해 보이는 눈이 내리고 세상이 환해져 있었다. 엄마한테 마음이 급해도 계절이 주는 선물은 꼭 보라는 뜻이었을까.
우주가 나한테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건 아니다. 건전지를 갈아 끼우는 아빠에게도 “아빠 할 수 이따!”라고 외치기도 하고, 아빠가 분리수거를 하고 오면 “아빠 고앵해떠!”하며 땀을 닦아주기도 한다.
우리 인생에 진득하고 든든한 내 편이 딱 한 명만 있다면 힘든 일이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들 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나보다 더 들떠 행복해하는 존재, 슬프면 함께 울어주는 존재, 다소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할 때에도 날 믿고 응원해 주는 존재. 그런 존재가 딱 하나만 있어도 우리는 살 힘이 생긴다는 거다. 근데 이 말이 내 마음속에 유난히 울렸던 것은,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들게 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지 다짐하게 해서다.
사실 그래서 나는 부모의 행운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 생에 가장 첫 번째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즘의 에피소드들을 반추해 보니 부모의 진짜 행운은 아이가 내게 그런 존재여서이지 아닐까 싶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무슨 옷을 입든, 그저 나를 나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물론 커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요즘 내가 매일매일 작은 일들을 해치워나가며 행복한 이유이자 의미를 찾게 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