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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참 Sep 03. 2023

“우주 괴롭히지 마!” : 스스로를 지키는 멋짐

우주의 언어, 32개월

대학생이 되면서 생겨난 자유는 생각해 보면 어마무시한 것이었는데, 규칙이 없어도 있는 듯이 지키며 사는 성향인 나는 대학생 자유의 모든 종류를 충분히 만끽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제대로 일탈해 볼걸이라는 아쉬움도 있지만 어차피 돌아가도 똑같이 지루하게 살 나라는 걸 너무 잘 안다. 사실 대학에 가고 주어진 자유 중 내게 가장 혁명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친구 취사 선택권>이었다. 나와 잘 맞는 친구들만 더 자주 선택적으로 볼 수 있다는 거였다. 내게 스트레스 주는 사람을 보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적당히 ‘으른의’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던지. 신기하게도 주변에 내가 느끼는 최고의 자유에 공감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요즘이야 ‘반 아이들 모두가 너의 친구가 아냐. 너랑 친한 사람만 친구지.’라는 건강한 말을 해주는 시대지만 전에는 달랐다. 학창 시절 모든 친구와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이 아이들의 미덕이라도 되는 듯 은근하게 강요되는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모든 타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이상은 내게 꽤나 큰 부담이었다. 새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성격이라 더 그랬을 거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무리해서 남에게 맞추려고 노력하곤 했다. 그게 별 탈 없이 친해지는 지름길이었으니. 진심이 아니었던 것은 아닌데, 진심이 너무 급하게 나와 있으니 스스로를 챙길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 오랜 시간 견고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화를 내는 것,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티 내는 것이 점점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딸아이는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강단이 있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 빨리 깨닫고 자라나기를 유독 바라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집 선생님께 우주가 친구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 지와 더불어 혹시 우주를 힘들게 하는 친구가 없는 지도 물어보곤 했다.

















그때는 우주가 “엄마 ㅇㅇ이가 나를 때려떠!” 한 날이었다. 선생님께 우주의 말을 조심스럽게 말을 전하며 걱정을 숨길 수 없는 눈빛으로 우주의 친구 관계를 물었다. 돌려 돌려 말했지만 결국엔 우주가 괴롭힘을 당할 때가 있는지 그리고 그에 주눅 들진 않는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때 선생님의 눈가에 웃음이 번져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요즘 ㅁㅁ반 친구들이 서로가 서로를 때리곤 해요. 그런데 우주는 절대 당하고만 있지 않아요 어머니..!” 집에서 엄마, 아빠에게는 화를 내기도 하는 우주지만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면 수줍어하는 일이 더 많아 의외의 답변이었다. 내가 딸인 우주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우주가 팽창하며 자란 것이, 그리고 우주가 그만큼 내가 모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좀 멋졌다. 선생님의 답변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 날은 다름 아닌 조카의 백일 행사 때였다.


우리 아빠는 상반된 매력을 지닌 사람이다. 먼저 아빠를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도 알 수 있는 면: 아빠는 늘 배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지적 호기심이 많아 집의 모든 면이 책일 정도로 읽는 것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특정 작가나 철학가에 꽂히면 그의 모든 책을 사서 쌓아두고 읽는 열정을 가진, 어떻게 보면 오타쿠라는 말이 없던 시대의 오타쿠랄까. 아빠랑 여행을 가서도 캐리어에 한가득 책을 싸가지고 가 읽기만 한 낭만적이 기억이 나에겐 너무 좋게 남아있다. 그리고 반전의 면: 아빠는 친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장난꾸러기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몰입의 시간에서 빠져나오면 유머가 묻어난 언어와 행동을 보이는 데 그 온도 차가 귀엽다. 움직임도 말투도 좀 귀엽다. 그런데 가끔 장난이 지나치게 나올 때도 있다.











조카의 백일 날도 아빠가 기분이 좋은 지 장난기가 가득했다. 우주에게도 어김없이 장난을 쳤는데(아빠의 프라이버시일 수 있음으로 글로 적어두진 않겠다.) 우주가 기분 나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빠가 모를 수 있으니 하지 말라고 하려는 데 우주가 먼저 2살의 날카로움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우주 괴롭히지 마!!!”


우주의 단호함에 대한 놀람과 당황, 자신을 지키는 이 작은 생명체에 대한 대견함, 손녀에게 혼이 난 아빠에게 오는 미안함이 한순간에 겹쳐 머릿속을 과부하시키더니 이내 웃음으로 새어 나왔다. 가족들도 다들 아마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우주 말에 동조하며 웃었다. 아빠가 그 후 우주 자리에 찾아와 “장난친 거 괜찮지?”라고 물었다. 그런데 또 우주가


“아니! 안 괜찮아!!” 하더라..


그 날일은 우주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엄청난 각인이 되었다. 우주는 어른인 나보다 스스로를 더 잘 지키는 아이인 것으로 판명 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배울 점도 얼마나 많은지! 물론 어른에게 말할 때는 훨씬 더 공손하게 말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주가 싫어하는 것을 싫다고 표현해 줘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이 날 처음으로 우주를 잘 키웠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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