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언어, 35개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일을 하게 된다. 아이가 없을 때는 여유 없는 스케줄도 버틸만했다. 다행히 일이 끔찍하게 싫지는 않았어서. 그런데 우주와의 공존을 생각하다 보니 변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선택을 찾게 된다. 우리 세 가족 모두가 가장 평온할 길. 아무튼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와의 공존이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일을 시작하면 아이와의 완벽한 공존을 이룰 수는 없다. 나의 경우 재취업을 고민하며 마지막에는 두 가지 일을 고민했다. 하나는 하원을 시키지 못하는 일이었는데 대신 급할 때 쉬는 게 가능했다. 하나는 등하원이 넉넉히 되는 일이지만 연차라는 것이 없었다. 우주가 아플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하느냐, 아니면 매일 보는 시간을 줄이느냐의 문제였다. 고민의 끝에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일단 매일 아이와 긴 퀄리티 타임을 갖는 게 내 가치관에는 맞았다. 적응해 보니 긴박한 상황으로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균형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가을이 온 것이다. 매년 가을은 내게 곧 충전이었는데 올해는 그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일이 두배로 늘어난 거다. 애써 이룬 균형은 쿠크다스처럼 쉽게 깨졌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물으셨다. “어머님, 요즘 많이 바쁘신가요?”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내가 여유가 없었는가 했는데, 우주가 달라졌다고 하셨다. 친구들과 잘 놀지만 오후 시간이 되면 엄마를 찾는다고 하셨다. 생각해 보니 요즘 등원할 때도 우는 일이 있었다. 나름 씩씩하게 티 안 내고 일하고 있다 믿었는데 내 단짝인 우주에게는 딱 걸렸나 보다. 균형에 가장 큰 금이 생긴 건 우주의 참관수업이었다. 일을 뺄 수 없어 우리 딸의 첫 참관수업을 가지 못하게 된 거다. 남편도 일이 많은 시즌이었고, 이미 연차를 못쓰는 나 때문에 아픈 우주를 보기 위해 수차례 반차를 쓴 이력이 있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으로 우주의 참관수업 일이 나의 생일이었다. 남편에게 얘기했다. “나는 다른 건 모르겠고, 우주 참관 수업에 오빠가 가주는 게 가장 큰 생일 선물일 것 같아.” 감사하게도 나는 이 생일 선물을 받았다.
속상하기만 한데 거기다 힘든 일은 한 번에 오는지 우주가 아픈 거다. 콧물이 줄줄 흐르는 우주를 데리고 병원 오픈런을 하는데 몸도 마음도 종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병원을 가는 길에 우리 집 꼬마가 들뜨며 말하는 거다.
“엄마 오늘 하늘이 더 예뻐졌어!
달이 우주를 따라와.
근데 달이 숨네. 부끄러운가보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살 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아는 눈이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재능이지만 내가 힘들 때는 눈이 멀고 만다. 그래도 괜찮다. 내 옆에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우주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내가 삶의 아름다운 행간을 찾지 못할 때, 대신 툭툭 던져주는. 나무 뒤로 숨은 달 덕에, 그걸 소리로 표현해 준 우주 덕에 나는 가까스로 평온을 되찾았다.
남편도 바빠진 것이 우주는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원래는 남편과 같이 하원을 가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요즘 도통 아빠는 하원 길에 보이지 않으니 우주도 심통이 단단히 난 거다. 아침에 어린이집을 가는데 우주가 의미심정하게 그리고 썩 기분 좋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 오느른 아빠도 데리러 올거야!”
확신에 차보이는 우주를 보며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저 확신으로 우주가 상처받을까 봐. 내 말을 듣더니 남편이 당했다는 듯 웃는다. 어젯밤 우주가 남편을 붙잡고 반협박조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아빠, 내일은 엄마랑 같이 우주 데리러 오꺼야.“
내가 그렇게 가급적 일찍 오라 해도 요지부동했던(당연한 일임을 알고 있다.) 남편은 딸의 한 마디에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겠다고 했다. 그날은 그렇게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하원했다.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형적일 때가 많다. 그걸 이뤄주기 위해 엄마, 아빠는 뭉쳐서 노오력해본다. 사랑해 우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