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언어, 33개월
우주가 아파서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병원에 가야 했다. 주말을 병원으로 시작하는 것은 속상하기도 하고 피곤하다. 나와 남편은 예약이 시작되자마자 지친 기운을 접어 두고 병원 대기를 재빠르게 걸고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늦으면 안 되니 유모차를 태우고 갈까 고민하는데 우주가 손바닥을 밀며 거절 의사를 표했다. 코찔찔이에 목이 아파도 에너지만은 많은 33개월은 그냥 걸어가겠다는 거다. 4(세)춘기를 누가 쉽게 말리랴.. 우리 셋은 결국 모두 걷게 되었다. 피곤한 걸음이었지만 무겁지는 않은 마음이었다. 우주도 뭐가 저리 기분 좋은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노래를 하듯 조잘댔다.
“셋이 가니 얼마나 조아,
하늘이 예쁘니 얼마나 조아!“
그러고 보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시기의 하늘은 하루의 모든 무게를 잠시나마 대신 짊어져 준다. 보고 있자면 걱정거리도 녹고 시간이 멈춘 듯 황홀해진다. 주말에 병원을 가는 나의 아쉬운 마음을 우주가 잡아끌었다. 그리고 이 찰나도 이리 아름다움을 기억하라는 듯 저리 말한다.
나는 소설을 유난히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나 작가를 묻는다면 주저할 것이다. 세상에는 정말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사는 작가를 생각해도 너무나 많은데 나보다 앞선 삶을 산 작가까지 더하면 가히 입을 뗄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10대, 나의 20대를 지배했던 작가들이 있긴 하다. 10대 때는 헤르만 헤세가 그랬고, 20대 때는 밀란 쿤데라가 그랬다. 5학년 때, <데미안>을 처음 읽은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내가 작은 노트에 책 속 문장을 쓰기 시작한 것도 <데미안> 때문이었다. 읽었던 인상 깊은 문장이 증발하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된 시작점이랄까. 그 후 4번 정도 더 읽으면서 신기했던 것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문장에 빛이 났다는 점이다. 수차례 읽어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경이, 고전의 미학은 여기에 있다. 대학교에 가면서는 밀란 쿤데라에 빠졌다. 동시대의 지성인인 작가가 음악, 역사, 심리, 철학을 아우르며 만드는 심포니는 평범한 나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지만 인간이 느끼는 찰나의 감정을 미분하듯 하나하나 풀어 설명하는 문체에 매료됐다. 통찰력과 표현력을 통해 완성된 글을 보고 깊게 공감도 하고 또 스스로를 새롭게 이해하기도 했다.
앞선 보물들을 찾는 곳은 다름 아닌 엄마, 아빠의 책장이었다. 방의 모든 벽이 책장이었던 우리 집은 따로 서재가 없이 모든 방이 서재 같았다. 방대한 관심사를 갖고 계신 부모님 덕에 내게는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었다. 엄마의 혹은 아빠의 책장에서 꺼내 읽은 책들은 곧 내 취향이 됐다. 슈테판 츠바이크, 무라카미 하루키, 한강, 줄리언 반스, 에밀 아자르, 오르한 파묵, 알랭 드 보통, 파울로 코엘료, 르클레지오, 파트리크 쥐스킨트, 아룬다티 로이, 베른하르트 슐링크, 프랑수아즈 사강. 부모님 덕분에 내향적인 내가 정말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30대를 지배하게 될 책을 찾게 된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동네에 새로 생긴 큰 서점이었는데, 책의 큐레이팅이 영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직관적으로 말하면 돈이 될만한 책들 위주로 배치되어 있었달까. 내 취향의 인문학이나 심리학, 고전 소설을 찾기 너무 힘들었다. 마음을 닫았지만 종이 책이 고파 둘러보고 있는데 눈을 끄는 책 하나를 발견했다. 엄청 두꺼운 책이었는데 내가 읽고 오래 여운이 남았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파스칼 메르시어의 신작이었다.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라 우주와의 일상에서 도통 다 읽을 수나 있을까 고민했지만,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을 때 재밌어서 단숨에 읽은 기억이 나 결국 샀다. 물론 아이가 없던 나와 있는 나의 생활은 달랐고, 새로 산 책을 다 읽는 데에는 우주의 33개월을 다 써야 했다.
한 달 내내 읽은 이유는 책이 길고 내가 시간이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등장인물, 문화적 배경, 스토리 전개뿐만 아니라 문체와 호흡마저 내 취향이라 나도 모르게 속으로 한 자 한 자 소리를 내며, 아끼고 아끼며 읽어서다. 그 책의 이름은 바로 <언어의 무게>다. 어쩜 제목마저 완벽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무게를 두고 읽은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시정(詩情)’이다. 주인공 레이랜드는 자신이 죽을병에 걸린 줄 알았다가 오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건 이후로 그는 결국 중요한 것은 시정이라고 말한다. 레이랜드가 이야기한 시정을 공유하고 싶다. :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현재를 온전히 현재로 두는 하나의 방식, 시간을 멈추는 수단이라고. 글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듣는 동안 우리는 과거를 그대로 두는데, 잊는다기보다 긴장하지 않고 놓아두는 것이지. 또 미래를 향한 힘겨운 희망 때문에 현재를 비튼다거나 지우지도 않네.
- 언어의 무게 / 393쪽
그렇다. 결국에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시적인 정취를 볼 수 있는가의 문제다. 매일을 견디는 힘, 혹은 향유하는 힘은 여기서부터 나온다. 그런데 그도 어느 정도 머릿속에 여유 공간이 있어야 보이는 것 같다. 아무리 순간순간이 시와 같아도 한 줄 한 줄 읽어나갈 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오늘 아침 나는 병원 가는 길이 시작부터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 집 작은 생명체는 가는 길의 모든 시적 정취를 놓치지 않고 일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우주 덕분에 되찾은 오늘의 유일한 아름다움에 감사한다. 그리고 우주가 힘든 날 내가 그녀의 하루 속에 그녀가 미쳐 발견 못한 시정을 읽어줘야지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