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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해

어린왕자 (1)

by 화요일


새벽 4시 55분

아. 일찍 일어났다. 나에게 한 시간이 주어졌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시계의 숫자를 보고는 안도한다. 옆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끌어당겨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춘다. 침대 끝에서 한번 더 눈을 감는다. 조금 더 게으름 피울 수 있는 시간에 감사하며


숫자라는 미지의 세계

나에게 숫자는 정복할 수 없는 영역이다. 더하기 빼기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질리도록 한 것인데, 아주 단순한 숫자계산 앞에서도 금세 얼음이 되고 만다. 흰 백지에 새로운 사업의 계획서는 몇 시간 만에 가닥을 잡고 내용을 써 내려가지만 수업 시간에 쓸 재료비 10만 원을 품의하고 계산하고 정산하는 작업은 시작 전부터 긴장되고 더디고 실수도 많다. 뭐가 문제인지..




번호 없이는 힘들어

1층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입구로 들어가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 집 층 숫자를 누른다. 집 출입문에 달린 도어록에 번호를 한번 더 누른다. 방에 들어가 씻고 누워 핸드폰 비밀 번호를 누르고 잠금 해제한다. 앗! 어제 친구들과 먹었던 음식값을 이체해야 한다. 모바일 뱅킹을 켜고 또다시 번호를 누른다. 이체할 금액을 누르고 이체 확인버튼을 누르면 다시 한번 이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완료된다. 디지털 세계는 편하지만 그 모든 출입은 숫자로 이뤄진다. 숫자 없이 사는 것이 힘든 세상이 돼버린 걸까.


바코드의 숫자로 읽히는 물건들, 출석부의 번호로 인식되는 아이들, 주민등록번호로 식별되는 사람들. 늘 우리와 함께하는 휴대폰까지 번호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을 소개할 때 어른들이 좋아하는 번호로 설명한다. 친구들을 소개할 때도 어른들은 항상 그들의 숫자에 관해 궁금해한다면서..



몇 학년이야?
몇 살이야?
몇 동에 살아?



번호로 식별되는 세상, 예전에도 이랬을까.



번호이전의 것들

머리를 빡빡 깎고 까마득하게 일렬로 서있는 훈련병들 속에서도 엄마는 아들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번호나 숫자의 도움 없이도.


숫자로 사람을 읽는다는 건, 행정적 편의, 제도적 편의에서부터 시작되었겠지. 어른들은 모두 숫자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숫자에 취약한 나이기에 억울한 점이 있다. 학기 초 많은 아이들을 익히고 외워야 할 때 나는 조바심 내지 않고 아이들의 특징을 머릿속에 담는다. 조용하고 눈이 작은 아이, 키가 크고 잘 웃는 아이, 걸음걸이가 특이한 아이, 00이랑 친한 아이, 창가 두 번째 앉은 아이, 이런 식으로 특징과 사람을 연결해서 외운다. 이 방법은 시간이 걸리긴 해도 잘 잊어버리지는 않는다. 몇 년이 지나 졸업생을 만나도 그 아이의 특징, 관련된 에피소드는 금방 기억해내곤 한다.


언젠가 한 번은 다른 선생님들처럼 번호와 이름을 따로 외워보려 시도한 적이 있다. 마치 영어단어 외우는 것처럼. 결과는 대참패였다. 뒤죽박죽 번호와 이름이 뒤섞여서 아이들은 '저 00이 아닌데요.'라며 서운함을 표시하고 엉망으로 외워진 이름을 다시 외우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등급으로 나뉘는 아이들

내신 9등급, 5등급으로 실력을 평가받는 아이들. 누구를 위해서일까. 다수의 아이들을 평가하고 분별하기 위한 행정적 편의와 투명성을 위해 등급으로 서열화했겠지. 이를 보완하고자 생활기록부에 교사들이 관찰하고 기록한 내용을 추가했으나 아직도 부족한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교육계에선 학생을 제대로 평가하고 선발하는 여전히 잘 해결되지 않은 뜨거운 감자다.




감각으로 서로를 인지하는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오랜 시간, 공들인 애정과 관찰로 키워진다. 하지만 동물들은 숫자도 점수도 없이 각각의 냄새로 서로를 알아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채는 섬세하고 정확한 정보는 차고 넘친다. 시골 할머니집의 구수한 구들장 냄새, 상쾌한 아빠의 스킨향기, 젖먹이 아기의 뽀송한 분유 냄새까지. 점수나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소중한 것들...


이른 아침, 힘들게 잠을 깨는 딸의 짜증 섞인 표정에서 피곤함이 읽힌다. 어제저녁 힘차게 문을 박차고 열고 큰 소리로 인사하며 들어오는 아들의 발걸음 속에서 신났던 그의 하루를 짐작하고, 침대에 누워 한참을 재잘거리다 잠든 막내, 쌕쌕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린다. '코에 뭐가 찼을까 내일은 이비인후과엘 가봐야겠네. '. 뒹굴거리던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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