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편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
너무나도 유명한 ‘가브리엘 샤넬’이 한 말이다. 난 한때, 패션학도의 길을 간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패션학과를 졸업하지 않았지만, 어느 한순간을 계기로 패션에 푹 빠지게 된 것이다. 그건 바로 패션쇼. 동생이 우연히 건네준 패션쇼 티켓은 내 인생을 흔들어 놓았다. 귀를 찌르는 음악, 런웨이를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모델들, 화려한 조명 속 피날레를 장식하는 디자이너의 겸손한 인사.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바로 이거다.”
군제대후 뭘 해야 할지 방황만 하던 나에게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바로 패션디자이너.
컴퓨터 전공이었던 나는 강남에 있는 패션디자인학원에 등록했고, 카드빚까지 내며 열정 하나로 버텼다.
3개월 쯤 지나,
수업을 마치고 단골카페에서 패션잡지를 뒤적이던 어느 날이었다.
“패션공부 하시나 봐요?”
검은 뿔테안경. 정갈한 헤어스타일. 멋스러운 구김의 린넨 셔츠와 청바지. 40대 정도로 보이는 트렌디한 중년의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커피를 워낙 좋아해 하루에 열 잔은 마시다면서, 나와 다른 카페에 가지 않겠냐는 뜬금없는 제안을 해왔다.
뭐라도 배울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나는 흔쾌히 동행했다.
그의 패션지식은 상당했다. 한 시간 정도 패션과 관련된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잠시 뒤에는 유명대학 의상과 교수님도 동석했다. 그는 나를 아끼는 후배라고 소개했다. 오늘 처음 만나 두어 시간을 보낸 나는, 그에게 ‘아끼는 후배’ 가 되어 있었다.
패션계에 잔뼈가 굵은 그들과 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그 자체가 뭐라도 된 것 같았다.
그는 날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돌아오는 주말, 자신이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집으로 와주겠냐고 물었다.
그의 집은 전북 익산. 멀어도 너무 멀었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날 패션디자이너로 키워 줄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날 패션계의 거장으로 만들어 줄 사람이었으니까.
집안 구석을 탈탈 털어 차비 3만원을 마련했고, 난 익산으로 향했다.
3시간 쯤 지나니 고즈넉한 시내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괜히 가슴이 뛰었다.
오늘 만남의 장소도 역시 카페였다. 작은 골목을 지나니, 고즈넉한 카페를 등지고 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대충 올 시간이라 미라 나와 있었어.”
그는 담배연기를 구름처럼 내뿜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배고프지...밥부터 먹자...”
장거리를 이동한 탓에 배가 많이 고프긴 했다.
그는 날 근처의 고기 집으로 데려갔고, 항정살 3인분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고기가 익어가는 동안에도 그의 패션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서울에서의 느낌과는 또 달랐다. 그와 한결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동시에 패션디자이너라는 꿈에 한 층 더 다가선 것 같았다.
우리 둘은 그 자리에서 항정살 7인분에 소주 두 병을 해치웠다.
2차로 라떼가 유명한 카페에 갔고, 이번에는 연예인 뒷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다는 연예인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마지막은, 그의 집이었다.
한적해 보이는 아파트 11층에 그의 집이 있었다. 간단히 옷을 갈아입고 그는 자신의 방으로 나를 초대했다. 모니터를 켜고 그의 작품과 영상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더니, 자신이 먼저 씻는다고 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모니터 속 작품에 집중해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끌꺽” 침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그 소리는 패션쇼 때 들었던 웅장한 소리보다 몇 배는 더 크게 들렸다.
그의 손길이 내 어깨를 스쳤고,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깐만요,”
난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고, 그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저...여...여자 좋아해요 선생님...”
더 이상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난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집을 뛰쳐나왔다.
“패션디자이너가 되려면 성적 취향도 바뀌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도, 그도 당황한 순간이었다.
난 그 사건 이후, 패션디자이너의 꿈을 접었다.
성적취향과 패션디자이너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지만, 그 때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으니까. 그리고 난 원래대로 여자들과 연애를 이어갔고, 그 자체만으로 행복했다.
얼마전,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았다.
대도시 서울을 배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흥수와, 거침없이 솔직한 재희가 위험한 동거를 하며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
퀴어 로맨스이자, 자아 정체성 회복을 담은 영화인데, 풋풋한 두 주인공의 연기가 무겁지 않고 따뜻하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사실 그 이야기들 중 하찮은 건 없다. 모두가 반짝거리는 보석이고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자기야, 이 코디 어때?”
왕년에 패션공부 좀 해 본 터라, 자신 있게 어필해본다.
“오빠는... 솔직히 패션 센스가 진짜 없어...”
강력한 돌직구다. 아내는 언제나 진실만 말한다. 그래서 더 뼈아프다.
패션센스는, 정말 타고나야 되는 걸까?